한국일보

눈먼 자들의 도시

2018-04-07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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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덕과 비행(非行)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뉴스를 보는데 이 책 생각이 났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세상사람 모두가 눈이 멀고 단 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 가설로 시작된다. 허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현대인과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가치관이 붕괴되고 인간성마저 잃어가는 현대 사회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마치 전염병처럼, 그러나 아무런 예후도 징조도 고통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는 병이 차례로 전염된다. 접촉을 한 사람들이 하나씩 감염되어 마침내 모두가 눈이 멀어 버리는 믿지 못할 상황이 전개된다. 엄청난 재앙 앞에 정부는 감염자들을 차례로 수용소에 격리한 채 방관할 뿐, 속수무책이다.

이 소설에서 눈이 먼 사람들은 단순히 시력을 잃은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녔던 모든 물질적, 정신적 소유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못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은 변한다. 자신의 삶 속에 이미 융합되었다고 여기던 도덕과 질서도 이성도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한다. 다만 본능에 의존하는 동물 같은 삶이 이어진다. 무질서한 가운데 아무데나 쌓인 배설물과 쓰레기로 오염되어 수용소는 악취와 병균이 득실거리는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질서는 어느 한 사람이 흩트리면 우르르 따라 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깨끗한 거리에서는 휴지 하나도 버리기 어렵다. 그러나 누군가 먼저 버린 것이 눈에 띄면 별 가책 없이 하나 둘씩 쓰레기를 버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그래서 ‘시작’이 무서운 것이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거리낌 없이 하게 만드는 ‘처음’처럼.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윤리도 질서도 소용이 없는지 언어를 통한 이성적 화해나 설득보다 폭력이 앞서는, 바깥세상을 닮은 그들만의 또 다른 세계가 형성된다.
자기만 굶주림을 면하고 고통 없이 살아남겠다는 비굴함과 이기심. 그리고 힘 있는 자의 독점과 횡포가 자리잡아가는 그곳은 우리 사회의 권력과 이름만 달리할 뿐 익숙한 광경이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여자가 있다. ‘안과의사의 아내’인 그녀는 모든 것이 붕괴되어 버린 적나라한 인간성을 그녀의 뜬 눈으로 관찰하며 오히려 눈이 멀지 않은 자신의 운명을 원망한다. 눈 먼 자들 사이에서 눈이 보이는 사람은 그 사회를 장악하여 군림할 것 같지만 자아가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고통일 수 있다.

자기도 눈이 먼 척하며 모든 실상을 목격하는 그녀는 원초적 고통 속에서도, 보이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기꺼이 찾아낸다.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유대감을 형성하여 서로 돕고 의지하며 인간관계를 회복하도록 노력하는 일이 그것이다.

작가는 작품 속 ‘의사의 아내’를 통해 유형무형의 폭력과 사회계층 간의 괴리를 극복하고, 실종된 도덕관과 가치관의 회복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염원을 표출한다. 작품 속 아내는 희생과 헌신적인 봉사로 잃어버린 인간애와 신뢰를 극복함으로써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나누는 세상을 만들고자 최선을 다한다. 일그러진 사회를 정화하는 아름다움이며 지고한 선(善)의 표상으로 작가는 ‘눈을 뜬’ 그녀를 등장시킨 게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며 소설 속 세상이 작가의 머릿속 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눈을 뜨고도 삶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채 허상에 매달려 갈팡질팡하는, 현대 사회와 현대인의 모습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남이 볼까 두렵다’는 말로 자제하고 스스로 경계하던 일은 옛말이 되었다. 이제는 남이 보는 데서도 스스럼없이 저질러지는 부도덕과 비행에 무감각한 세상을 사는 건 아닌지 두렵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세상을 보면서도 못 본 척 침묵하며 살아간다.

볼 수 있어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 볼 수 없어도 보는 사람들의 차이란 어떤 것일까.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등장인물 중 눈이 먼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가 말하듯이, 어쩌면 우리는 눈을 뜨고도 눈이 먼 것처럼 사는지도 모른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극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서로 의지할 등을 마련하고 이해하며 함께 간다면 세상은 그리 어둡지도 불행하지도 않으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마음의 눈을 떠서 삶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느냐에 따라 지옥 같은 세상이라 해도 행복할 수 있고 천국 같은 세상에서도 불행할 수 있다는 게 나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사람 몸에서 그래도 영혼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게 바로 눈일 거야. 그런데 그 눈을 잃은 사람들이니.”

등장인물인 안과 의사의 입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우리는 뜬 눈으로 세상을 바로 보며 살고 있는지. 바로 보면서도 방관자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하는 오늘이다.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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