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다이구아나·땅거북…생명의 진화와 마주하다 (태고의 자연 갈라파고스)

2018-03-23 (금) 글·사진(갈라파고스)=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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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사자가 태양 아래 오수 즐기고, 거북이 산란 토르투가베이 석양 찬란

▶ 블루풋부비·핀치새 등 희귀동물 천국, 세상서 가장 큰 새 앨버트로스도 만나

바다이구아나·땅거북…생명의 진화와 마주하다 (태고의 자연 갈라파고스)
바다이구아나·땅거북…생명의 진화와 마주하다 (태고의 자연 갈라파고스)

갈수록 줄어드는 갈라파고스땅거북의 개체 수를 늘리기 위해 찰스다윈스테이션·자이언트거북보호센터 등에서는 성체가 될 때까지 보호하고 생육환경에 적응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바다이구아나·땅거북…생명의 진화와 마주하다 (태고의 자연 갈라파고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벤치는 바다사자 차지다. 갈라파고스에서 인간은 손님일 뿐이니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술·담배만 중독성이 강한 게 아니다. 모험도 그렇다. 스리랑카의 차밭과 바다, 러시아에서 조지아·아제르바이잔으로 이어지는 캅카스산맥, 탄자니아 세렝게티 등 직장인으로서는 선뜻 떠나기 어려운 여행지를 하나씩 찾아가다 보니 해가 거듭될수록 생소한 여행지를 찾아 나서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그래서 이번에 택한 곳은 어디냐고? 에콰도르 본토에서도 966㎞나 떨어진 태평양의 보물섬 갈라파고스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섬이네. 근데 그게 어디에 있어?”

갈라파고스에 간다고 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한결같았다. 학창 시절 찰스 다윈의 전기를 읽으며 한 번쯤 접해봤지만 딱히 지도에서는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곳. 약 500년 전 한 파나마 주교의 표류로 발견됐지만 지옥의 오명을 벗어나 지도에 오르기까지 200년의 시간을 숨죽여 기다려야 했던 곳.


지금은 전 세계 모험가들이 모여드는 대표 생태 여행지가 됐어도 우리에게 여전히 생소한 데는 이유가 있다. 가는 길부터 험난하다. 미국에서 한 차례 경유하고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서 또 한 차례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이동해야 하는 탓에 공항 대기시간을 포함해 가는 데만 꼬박 36시간이 걸렸다.

한국보다야 저렴하다지만 에콰도르 경제 수준을 고려하면 물가도 만만치 않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탓에 장기여행 중인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찾을 수밖에 없는데 예산이 한정된 장기 배낭여행자로서는 큰맘 먹고 가야 할 수준이니 국내 여행자들에게는 불모지에 가깝다.

동물의 왕국…인간은 그저 손님일 뿐

단돈 1만~2만원이라도 아껴보자는 생각으로 보통 여행자들이 거점으로 삼는 산타크루즈섬(발트라공항) 대신 산크리스토발공항을 통해 갈라파고스제도에 입성했다. 택시요금 2달러에 10분도 안 걸려 도착한 마을에서는 적도의 태양 아래 오수를 즐기는 바다사자들이 기나긴 여정에 지친 여행자를 맞아준다. 찹쌀떡 표면처럼 만질만질한 녀석들의 몸을 당장 쓰다듬어주고 싶지만 갈라파고스에서는 동물과의 최소거리 2m 규정을 엄수해야 한다. 물론 규정이 없더라도 한 성격 하는 녀석들이 인간에게 몸을 내줄 리 없다. 좁은 골목길을 막아선 채 늘어져 있는 녀석들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려다가 결국은 화를 돋우기 일쑤. 두 날개를 파닥이며 꽥꽥 소리를 지르는 바다사자에게 쫓겨 줄행랑을 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물속에서 만난 갈라파고스의 생명체들은 인간을 불청객이 아닌 손님처럼 대해줬다. 이른 아침 부지런을 조금 떨면 단출한 스노클링 장비만으로도 바닷속에서 색색의 물고기는 물론 바다사자와 거북이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갈라파고스는 태평양의 주요 해류 4개가 만나는 덕분에 풍부한 해양 생태계를 자랑한다. 500여종이 넘는 물고기들이 갈라파고스 인근 해역에 산다. 다이버들의 엘도라도로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특히 산크리스토발 인근의 키커록, 산타크루즈에서 당일 투어로 갈 수 있는 시모어, 고든록 등은 꿈의 다이빙 포인트로 꼽힌다. 해머헤드상어(귀상어), 화이트팁상어(장완흉상어) 등 다양한 상어를 만날 수 있는데다 깊은 바닷속에 숨겨진 화산섬의 비밀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

특히 갈라파고스 조류들의 천국으로 꼽히는 키커록은 파란 발이 앙증맞은 푸른발부비새(얼가니새)와 마스크부비, 빨간 목덜미가 돋보이는 군함새, 날지 못하는 가마우지, 세상에서 가장 큰 새 앨버트로스 등 다양한 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포식자가 없고 먹이도 풍부해 새들의 둥지 역할을 한다. 키커록으로 향하던 망망대해에서 생후 6개월이 채 안 된 앨버트로스를 만났다. 불과 몇 달만 있으면 날개 길이 4m, 한 번 날면 5,000㎞ 이상을 여행하는 능력자가 될 녀석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앙증맞은 외모를 소유했다.


갈라파고스에만 있는 그대

이제 찰스 다윈의 여정을 따라 갈라파고스 고유종을 만나볼 시간이다. 대표주자는 목이 긴 갈라파고스땅거북과 현무암처럼 까만 바다이구아나. 바다사자에 블루풋부비에 10여종이 넘는 핀치새까지 갈라파고스는 치열하기 짝이 없는 귀여움의 경연장이라 평소 같으면 파충류에게까지 애정을 쏟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곳을 떠나면 영영 만나지 못할 생명체라고 생각하면 애틋해진다. 바닷속을 유영하는 이구아나와의 첫 만남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콧바람으로 염분을 토해내는 이 녀석은 무려 40분간 헤엄을 칠 수 있다고 한다.

목이 긴 거북이의 진화 역시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다. 화산섬에 힘겹게 뿌리내린 선인장의 열매를 따먹기 위해 거북이의 목은 길어졌고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 선인장은 나무처럼 키를 키웠다. 척박한 화산섬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분투에서 생명의 고귀함을 느꼈다면 너무 진지한 표현이다. 그저 생명에 아로새겨진 분투의 역사가 경이로울 뿐이다.

갈라파고스를 누빌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이 땅을 지켜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인간의 손길이 조금이라도 덜 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벨라섬에서 시에라 네그라 화산 트레킹을 인솔한 현지 가이드 루이스 페르디난도는 갈라파고스에서 진행된 외래종과의 전쟁을 설명하는 데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화산 일대를 뒤덮은 구아바 나무와 블랙베리 나무는 외지인을 따라 들어온 외래종이다. 경쟁자와 천적이 없는 이 땅에서 외래종은 공격적으로 뻗어나갔고 고유식물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개·돼지·소·염소·쥐 등 인간이 들여온 동물들은 거북이와 이구아나의 알을 먹어치우거나 짓밟기 일쑤다. 관광객 1인당 체류기간을 연간 90일 이내로 제한하고 비행기 소독에 철저한 수하물 검사를 실시해도 외래종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갈라파고스 고유종의 최대 천적은 인간인 셈이다.

깨달음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마땅하다.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 100달러의 입도비가 동식물 보호에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푸른바다거북의 산란을 위해 오후5시면 폐장하는 토르투가베이의 찬란할 석양을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종족 번식에 힘쓸 거북에게 양보해야 마땅하다.

월급쟁이 모험가도 꿈꿀 수 있는 곳

갈라파고스에서 만난 인연 대부분의 이력은 화려했다. 대다수는 세계 일주 중이었고 환경운동가나 생태학자도 많았다. 키커록 다이빙 버디였던 미국 올랜도 출신의 케빈은 환경공학자인 아내의 출장길에 동행한 다이빙 전문가였고 시에라 네그라 트레킹 중 만난 캐나다 출신의 생태학자 마이클은 아내와 함께 키토 인근의 시골 마을에 머물며 주민들을 대상으로 석 달간 영어와 생태학을 가르치는 자원활동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갈라파고스를 찾았다.

산크리스토발에서 사흘, 산타크루즈섬에서 사흘, 이사벨라섬에서 이틀의 시간을 보냈다. 열흘 남짓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왕복 비행에만 꼬박 사흘이라는 시간을 들여 이역만리의 땅을 찾은 이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갈라파고스는 월급쟁이 모험가의 버킷리스트에도 한자리 차지할 만한, 실행에 옮겨볼 만한 여행지였다.

태고의 자연을 간직한 이 땅, 경이로운 진화의 힘으로 생명을 이어간 동식물이 주는 감동은 컸다. 감동이 이어지려면 인간의 역할이 크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여러 가지 실천 목록이 만들어졌다. 빨대나 일회용 컵을 덜 써야겠다. 플라스틱 사용을 자제해야겠다. 그리고 다음에 갈 때는 갈라파고스의 생명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지 찾아봐야겠다.

<글·사진(갈라파고스)=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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