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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과 장마당

2018-03-13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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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주민들은 대부분 봉건제 하에서 살고 있었다. 봉건제란 영주 등 일부 귀족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대다수 주민들은 농노로 노예 비슷한 삶을 사는 제도를 말한다. 이런 사회를 바꾼 것은 시장이었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지역 간의 물자 이동도 활발해졌고 교통의 요지는 자연스럽게 교역의 중심이 됐다. 근대 도시가 처음 일어난 곳은 예외 없이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도시라는 단어의 ‘시’는 시장이라는 뜻이고 소상공인의 원어인 ‘부르주아지’도 도시인 ‘부르그’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부가 축적되면서 시민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체 무력을 갖게 됐고 사치와 향락, 전쟁으로 자금이 쪼들리는 왕과 귀족, 영주들에게 돈을 꿔주며 채권자로 부상하게 된다. 이 힘을 바탕으로 자치권을 획득, 왕과 귀족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집단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도시의 공기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도 이 때 나왔다.


작년까지 전쟁 일보직전으로 치닫던 한반도 분위기가 금년 들어 급속히 변하고 있다. 핵은 협상용이 아니라며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를 향해 맹비난을 퍼붓던 북한은 남북, 북미 정상 회담에 합의하며 돌연 비핵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어째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일차적인 이유는 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대북 제재가 효과를 나타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제재에 미온적이던 중국도 대북 원유 공급을 비롯, 무역량을 대폭 줄였고 러시아 등 세계 각국도 북한 노동자들을 돌려보내고 있다.

대북 제재는 옛날부터 있어 왔다. 그 동안 제재를 잘 견디던 북한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 급속도로 확산된 장마당 때문으로 본다. 이 때 북한 정부가 주던 식량 보급이 사실상 끊기면서 주민들은 장마당을 통해 각자 도생에 나섰고 이를 통해 생계를 이어 왔다. 노동당 고위 간부들도 받는 월급으로는 생활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장마당을 묵인하고 뇌물을 받아 사는 것이 일반화 됐다는 것이다.

북한 전역에 퍼진 장마당은 ‘자력갱생’이란 구호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중국 무역 의존도를 크게 높였는데 이것이 대북 제재로 급감하면서 노동당 간부들까지 그 고통을 실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탈북자는 “북한에는 당이 두 개다. 하나는 노동당이고 다른 하나는 장마당인데 지금은 장마당 힘이 더 세다”고 말했다 한다.

북한이 급속히 평화 모드로 전환한 것은 미국의 ‘코피 작전’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이 본보기로 평양의 김일성 동상 한 두개만 폭격할 경우 김정은은 상당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미국 공격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면전을 벌일 경우 김씨 정권의 몰락은 필연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남북, 북미 정상 회담에 합의하면서 김정은은 예상대로 핵과 미사일 실험 중단을 들고 나왔다. 북한으로서는 가장 쉬우면서 ‘통 큰 양보’ 행세하기 좋은 조치다. 북한은 이미 상당수 핵과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에 가뜩이나 자금이 마른 지금 거액을 들여 추가 실험을 할 필요가 없는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재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는 이와 다른 문제다.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와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IVD)를 원하는 반면 북한은 북한 핵 문제의 근본 원인은 주한 미군이 북한의 존립을 위협하기 때문이라며 주한 미군의 철수를 우선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북한 안보에 대한 위협이 사라지면 핵을 포기할 수 있다”고 밝힌 것은 이런 맥락으로 지난 수십년간 일관되게 펴온 주장이다.

과연 북한은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에 동의할 것인가. 아직까지는 회의적 의견이 다수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핵밖에 없는 북한인데다 이를 포기하고 미국과 맞장 뜨려다 생을 마감한 후세인과 가다피의 선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설사 비핵화에 합의한다 해도 이를 이행할 지도 미지수다. 1994년 제네바 합의로 핵 폐기를 약속해 놓고 2002년 몰래 핵을 개발해 온 사실이 들통 나자 태도를 돌변, 핵 개발 권리를 천명한 북한이다. 한반도에 봄바람이 불고 있는 듯 보이지만 진정한 평화까지 갈 길은 멀고도 험해 보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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