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맹인 안마사’

2018-03-13 (화) 이기와(1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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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 안마사’

윤태자,‘#82’

이 얼룩진 어둠의 침대에 꿇어앉아
몸의 어디를 더 주무르라는 거예요
소경이라고 이래도 되는 거예요
아-, 아파요
이 손 놓으세요
내 손을 막연장처럼 함부로 다루지 마세요
나의 삶은 어제나 오늘이나 온통 밀실인데
당신 삶에는 밀실이 따로 있나요
자꾸 어디로 더 깊이 들어오라는 거예요
알 만한 분이 왜 이러세요
어둠이 좋아 내 눈이 멀었겠어요?
돈이 좋아 내 손아귀 힘이 세졌겠어요?
이거 왜 이러세요
긴장을 풀라는 말은 제가 할 소리예요
빛의 복판에서도 길을 못 찾는 당신
당신도 영혼을 기댈 지팡이가 필요하군요
단번에 생의 절정에 닿게 해주겠다는
그 능청능청한 고무 혓바닥 좀 저리 치워줘요
몸의 딱딱한 총도 이제 좀 내려놓으시고요
어둠이 어둠을 더럽힐 수 있나요?
어둠은 빛의 성역이었어요
무녀리 빛이 장난삼아 어둠을 더럽힌 뒤로
이렇게 당신은 창백한 외부로
나는 캄캄한 내부로 샅을 대고 앉아, 쉼없이
갈팡질팡하는 거예요

이기와(1968- )‘맹인 안마사’

시를 소개하면서 시인 자신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그녀는 남존여비가 사라졌다고 해도 삶 곳곳에 버젓이 남아 있는 노리개로써의 여성성의 하대, 그 수모와 불평등, 서로가 묵인하고 외면하는 성 착취와 억압에 대한 폭로를 시에 담아 봤다고 한다. 그리고 몇몇 비난 받는 남자들 때문에 괜히 고개 숙인 남성들에게 미안해지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 시는 미투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미투는 단순한 여성운동이 아니라 약자들을 위한 사회운동이다. 신분과 직위와 힘을 이용해 약자를 강탈하고 가해하는 사람은 당연히 고발되고 처벌되어야 한다. 빼앗은 것이 무엇이던 말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임혜신<시인>

<이기와(1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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