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시 만나는 게 중요하다

2018-03-07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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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성과가 있을 것이란 기대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파격적일 줄을 정말 몰랐다.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특사단이 4월 말 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등 6개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그 내용 하나하나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특히 김정은이 대북특사단을 통해 비핵화의 의지를 밝힌 것은 강대강 대결로 치달아 온 미국과 북한 관계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 극적으로 성사된 남북정상회담 개최장소가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으로 결정된 것도 놀랍다. 북한처럼 폐쇄적이고 절대 권력자 한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체제는 지도자의 안위를 그 어느 국가목표보다도 최우선 순위로 여긴다. 그런 북한이 비록 판문점이긴 하지만 남측 평화의 집에서 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파격이다. 남과 북의 정상이 회담 전 핫라인을 개통키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결정에는 1,2차 정상회담으로 통해 얻은 학습효과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서 열린 1,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수구 보수진영은 ‘조공 회담’ ‘구걸 회담’이라며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이런 공세가 남북관계 진전에 걸림돌과 부담으로 작용해 온 것이 사실이다. 3차 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갖기로 한 이번 합의에는 아예 이런 공세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해도 남북관계, 미북관계는 더 할 수 없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대화의 물꼬를 트는 건 쉽지 않아 보였고 자칫 미국과 북한 간에는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이런 갈등상황에 일시적 휴지기를 주고 대화개시의 명분을 준 것이 평창올림픽이었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북한대표단이 남으로 내려와 문 대통령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돌아갔다. 북한선수들과 응원단, 예술단의 방문도 해빙에 한몫했다. 그리고 이번에 전격적으로 남북정상회담 성사가 발표됐다.

이 모든 것이 불과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사이에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역시 북한은 시스템이 아니라 지도자 한 사람의 의중과 결단에 의해 움직이는 체제임이 증명됐다. 그런 까닭에 남북정상의 만남은 한반도의 평화와 미래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인 것이다.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신뢰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김정은이 이번에 큰 결단을 내린 데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올림픽 기간 중 남쪽을 방문하고 돌아간 대표단을 통해 문 대통령에 대해 대화상대로서 믿을 만 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듯 적극적인 김정은의 행보를 해석할 길이 없다.

하지만 북한이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꿨다고 해서 당장 모든 갈등이 해소될 수는 없다. 비핵화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현격한 입장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제 문재인 정부에게는 미국과 북한이 이런 차이를 좁히기 위한 진정성 있는 대화에 나서도록 다리를 놓는 역할이 주어졌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는, 현명한 중재자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특사단 브리핑에는 북한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자신들의 체제보장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체제를 보장하겠다고 언명해 왔지만 거꾸로 북한은 체제를 보장해야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마치 인질과 몸값을 교환하면서 서로 먼저 건네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결국 미국과 북한 간 갈등의 본질도 신뢰인 것이다. 이런 신뢰를 조끔씩 쌓아가기 위한 과정이 외교요 대화이다.

그래서 서로 만나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단 몇 번의 왕래와 만남이 가져온 남북 간의 극적인 변화가 이를 확인시켜 준다. 길은 역시 자주 오고 가며 만날 때 생기는 법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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