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 (195) 제33대 Truman 대통령⑨

2018-02-16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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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휘젓고 다녔던 McCarthy 의 선동으로 미국민들의 위기의식이 상승하자 미국의 국회의원들도 자기들이 공산분자들을 용납하지 않는다는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국회는1950년에 McCarran Internal Security Act (국내보안법) 를 입법하여 공산주의자나 친공산 단체들은 검찰총장에게 등록하도록 하였다. 문제는 법집행이 애매하여 어느 단체나 기관들이 꼭 등록을 하여야만 하는 것을 판정하기가 쉽지 않았었고 대부분의 큰 단체들은 회원들중에 공산분자가 하나도 없다라는 증명을 사실상 하기도 어려웠었다.

성분이 애매한 단체들은 회원명단과 재정보고서를 자진해서 냈어야 하였다고 한다. 공산당원이 되는것은 위법이 아니었으나 “공산주의자”를 방위산업에서 고용하는것은 위법이었었다. 이 법으로 “국가위기”시에는 대통령에게 아무라도 “간첩이 되거나 sabotage 를 할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자” 들을 체포할수 있는 권한을 주었었다.

Truman 은 이 법이 “1798년의 국가반역법” (Sedition Act of 1798) 보다 더 가혹한 법이며 앞으로 미국이 전제주의 국가가 되도록 만들 법이라면서 veto 를 하였었다. 그러나 국회는 이 법을 재통과 시킴으로서 법률로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해방” 이후 우리나라 에서 “사제공산당원” 이나 “관제 빨갱이” 들의 양산으로 겪어야 했던 슬펐던 정치역사를 연상하는 독자들도 있으시리 라고 생각한다.


1950년에 위에 설명한 법을 입법하여 통치상의 재미를 맛본 미국의 국회는 1952년에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이민문제를 법률로 해결하고자 하여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명목 으로 새 이민법인 McCarran-Walter Act (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of 1952) 를 통과시켰으나 Truman 이 veto 하자 재통과 시켜 법률로 확정시켰다.

이 법은 유럽의 북쪽과 서쪽에서 오는 이민을 우대하는 기존의 quota 제도를 존속 시켰으며 미국을 방문하고자 하는 외국인들에게 복잡하고 모욕적인 “충성심” 조사를 받도록 하였으며 미국내 거주자가 공산주의자 이거나 친공산주의자 임이 밝혀지면 그가 미국시민이 된후에라도 미국의 검찰총장이 추방할수 있도록 하였다. 최근 Trump 대통령 이 국회에 요구하고 있는 이민법개정안에 이와 비슷한 조항들이 들어있는것이 자못 흥미롭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 법으로 그때에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아시아인들이 미국시민이 되는것을 허용하였고 매년 아시아인 2천명이 미국에 입국할수 있도록 quota 를 활당했었 다고 한다.

미국사람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계속 되었는데 원자탄간첩 Klaus Fuchs 의 조사결과 Julius and Ethel Rosenberg 부부와 Morton Sobell 이 쏘련에게 중요한 원자탄 비밀을 전했다고 밝혀져서 그들은 1951년에 오랜 재판끝에 각각 사형언도와 30년 징역형 을 언도 받았었고 Rosenberg 부부에게는 1953년 3월에 사형이 집행되었었다. 많은 미국 사람들은 Rosenberg 부부가 억울한 혐의를 받았고 또 사실상 유죄이었을 지라도 평화시에 사형을 받을 범죄는 아니었었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이들 부부의 사형집행 이 미국의 반유태인 정서 때문이었다고 지금까지도 주장하고 있다.

미국사람들이 이처럼 공산주의에 대하여 신경과민이 되어 있을때인 1950년 6월 25일 에 미국사람들이 분명코 쏘련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리라고 의심했던 한국전쟁이 일어 났다.

“공산주의소탕” 에 휩쓸린 미국과 한국전쟁의 발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조선은 36년만에 일제의 쇠사슬로부터 풀려 나왔으나 미쏘양군들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편의상 합의했던 38도선을 경계로 우리나라는 두 동강이가 나고 만다. 조선은 1947년의 UN 의 결의에 따라 자유선거를 통해서 단일 정부를 수립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쏘련의 반대와 북조선의 강점으로 남조선 에서만 1948년에 총선거를 통해 국회가 개원되고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이승만 박사가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었다. 쏘련은북조선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라는 공산괴뢰정부를 수립하여 김일성이 수상으로 군림하게 하였다.

1949년 6월에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한후 38도선에서 소규모의 국지전투들이 가끔 있었었고 남과 북 에서는 “북진통일,” “남진통일” 등의 구호를 외쳐대고 있었었다. 드디어 1950년 6월 25일에 쏘련의 원조로 “잘 무장된 북한의 6만대군” 이 국방력이 시원치 않았던 남한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북한의 남침을 보고받은 Truman 대통령은 직각적으로 단호하게 남한의 방어에 나섰다. 그는 Dean Acheson 국무장관에게 UN 안전보장위원회를 긴급소집하여 한국문제에 대처 하도록 지시하였다. 마침 쏘련은 중공을 중국의 대표로 UN 이 받아드리지 않는것에 항의 하여 6개월째 안전보장위원회에 참석하지 않고 있던 때이었다. veto 권을 행사할 권한이 있던 쏘련이 불참한 안전보장위원회는 9 대 0 으로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면서 북한군이 즉시 정전을하고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할것을 명령하였다. 동시에 안전보장위원회는 모든 UN 회원국들에게 위원회의 결의가 집행되도록 협력할것을 요구하였다.

Truman 은 각계 요인들과 협의를 한후 미해군 제7함대가 대만을 방어하도록 명령하고 일본에 있는 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한국에 미국 공군과 해군병력을 투입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군사력동원은 안전보장위원회가 요청한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반응 이었었다. 그러나 민주, 공화 양당은 Truman 의 결정을 지지하였었고 하원은 기립박수로 그의 결단을 환영하였었다고 한다.

Truman 의 독자적인 병력출동의 결정은 한국전쟁이 너무 급박한 탓이었기도 하였지만 그는 미국헌법에 규정된 태통령의 군사통치권에 따라 합헌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여서 국회의 사전동의를 구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와같은 Truman 의 헌법해석이 꼭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만일 Truman 이 국회의 동의요청을 하였더라도 당시의 국회가 그의 결정을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며 실제로 국회가 그의 결정의 합헌여부를 별로 문제로 삼지 않았었다고 한다. 안전보장위원회는 쏘련의 veto 권 발동이 없었던 까닭에 UN 사상 차음으로 UN 군 사령부를 어렵지 않게 창설한후 미국에게 사령관을 임명하도록 요청하였다. 19개국들이 병력이나 군비를 제공함으로써 한국전쟁에 참전하였고 미국은 MacArthur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참전병력의 80% 는 미군들이 었었다.

UN 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최후의 보루인 부산에서 서쪽으로 30 마일, 북쪽으로 65 마일이 되는 지점까지 몰려있었다. 이제는 장개석의 전례를 따라 제주도로나 후퇴 할수밖에 없어 보이기도 했던 남한은 1950년 9월 15일에 MacArthur 의 인천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북한의 허를 찔러 서울이 탈환되고 인민군은 대략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두동강이가 나서 남한에 갇혔던 인민군들은 포로가 되거나 사살되었었다.
이제 한국전쟁은 한국의장래를 결정할수도 있는 중요한 기로에 와 있었다. 전쟁을 38도선에서 중지할것인지 북진을 계속해서 남북통일을 할것인지를 결정해야할 단계에 왔던 것이었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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