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ent to your wedding (눈물의 결혼식장) 노래 : Patti Page
팝송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이 노래를 들으면 “아 ! 이 음악” 할 정도로 한국에서 잘 알려진 노래 중의 하나이다. 1950년 이후로 오늘날까지 라디오 전파를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들 곁을 떠나지 않은 불후의 명곡이다. 가버린 연인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눈물흘리며 부르는 월츠 리듬의 노래이다.
“당신을 잃은 슬픔에 괴로웠지만 난 당신의 결혼식장에 갔었죠. 가련한 나의 가슴은 계속 울고 있어요. 당신의 꿈은 끝났다고 하네요. 당신의 신부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사랑에 넘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네요. 그때 난 한숨을 쉬며 나의 행복에게 안녕을 말했죠. 당신의 어머니도 울고 당신의 아빠도 울고 그리고 나도 울었죠. 당신을 잃은 슬픔에 눈물이 한없이 흘러 내렸죠. 당신의 결혼식장에서”
한국 팝송 역사상 많은 여성 가수들이 소개 되었지만 “패티 페이지” 만큼 사랑받았던 여자 가수는 없는 것 같다. “카니 후란시스”, “브렌다 리”, “테미 와이넷트” 등도 “패티 페이지”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부른3 대 월츠곡인 “테네시 월츠”, “체인지 파트너”, “눈물의 결혼식” 등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기때문에 역대 최고의 여성 가수였다. 한국의 최고 가수 중의 하나였던 “ 패티 킴”도 그녀의 팬이었으며 이름도 “ 김혜자” 에서 패티 킴으로 바꿨다.
“패티 페이지” 는 1927년 11월 27일 오클라호마주 클레아모어에서 빈농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철도회사 근로자였으며 어머니와 언니는 목화밭에서 일을했다. 집에는 전기가 없어 밤에는 책을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가난 속에 자랐다.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지방 라디오 방송국 KTUL음악 프로에 출연하기로 되어있는 가수가 몸이 아파 출연할 수가 없어 대타를 찾던 중 당시 18세였던 패티 페이지가 대신 노래를 하여 큰 호평을 받아 이후 부터는 “페이지 밀크” 회사로 부터 후원을 받아 15분짜리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이때에 본명인 “클라라 앤 파울러”에서 스폰서 회사 이름인 “ 페이지” 로 바꿨다. 1946년 밴드 매니저인 “ 잭 라올”이 우연히 라디오에서 “ 패티” 의 노래를 듣고 그녀를 자신의 밴드인 “지미 조이 밴드” 에 전속 가수로 등용 시켰고 1947년 드디어 세계 최고 밴드 중의 하나인 “ 베니 굳맨”과 함께 노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머큐리”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맺은 후 1948년 “I confess” 로 데뷔했다.
당시 이 노래를 녹음할 때 화음을 담당하던 코러스 팀들이 파업을 하여 백코러스를 할 수 없게 되자 녹음담당 기사인 “빌 푸트남”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 해냈다. 그것은 “오버 더빙” 방식으로 녹음을 하여 마치 듀엣으로 노래 하는 것 처럼 처리했다. 이 방식은 1950년 발표한 “패티 페이지” 의 대표곡인 “ 테네시 월츠”에서 사용하여 13주간 1위를 차지하여 큰 재미를 보았다.
1952년 “제시 메 로빈슨” 이 작사 작곡한 “눈물의 결혼식장” 을 발표하여 미국 팝 인기 차트 순위에서 8 주간 정상을 지켰다. 이후 “진열장 속의 강아지”, “ 체인지 파트너” 등을 노래하여 국내팬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얻었으며 1960년 초에는 “올드 케이프 카드”, “엘리게니 문”, “허쉬 허쉬 스윗 샤롯트”를 레코딩하여 인기 차트에 올려 놓았다. 1960년에 영화 “엘머 갠트리”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이후 부터는 락캔롤 뮤직에 눌려 그녀의 인기는 차츰 시들어 갔다. 허지만 국내에서 그녀의 인기는 꾸준하게 사랑 받았다.
60년 간 가수 활동에서 59개의 음반을 레코딩했고 110개의 노래를 히트 시켰다. 그녀가 그렇게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 중 의 하나는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시냇물 흘려 가듯 나지막하게 읖조리는 창법과 애수가 가득찬 그녀의 음색이 우리들 귓전을 잘 파고 들었고 무엇보다도 상처받은 연인들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잘 표현 해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
정태문 라디오 DJ 및 팝 컬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