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혼자 하는 식사’

2018-02-08 (목) Li- You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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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하는 식사’

정은실 ‘어머니’

올해 마지막, 어린 양파들을 캤다.
밭은 이제 황폐하다. 흙은 차고 갈색이고 누추하다.
시야의 한쪽, 단풍나무에서 하루의 꼬리처럼, 불꽃이 탄다.
고개를 돌리니, 한 마리 홍관조가 날아간다.
지하실 입구에서 양파를 씻고
차가운 수도꼭지에서 물을 마신다.

몇 년 전, 바람에 떨어진 배밭을
아버지와 나란히 걸었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말없이 걸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를 본다 -삐걱거리는
왼쪽 무릎에 손을 얹고 엎드려
썩은 배를 주워서 보여주셨다. 그 안에
반짝이는 즙에 천천히 뒤 덮히며
미친 듯 왱왱거리던 땡 벌 한 마리

오늘 아침, 아버지가 나무 사이에서
손을 흔들고 계신 것을 보았다. 아버지
하고 부를 뻔 했다, 가까이 가 보니
그것은 삽이었다. 명멸하는 짙은 푸름의 그늘 속에,
내가 세워 놓았던


밥이 다 되었다. 양파와 볶은 달콤한 파란 콩,
참기름과 마늘에 지진 새우. 그리고 나의 외로움.
나, 이 젊은이에게,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Li- Young Lee ‘혼자 하는 식사’ - 임혜신 옮김

리영리의 시는 대개가 현대가 가진 모든 문제에서 아주 먼, 방역된 이코스페어같다. 그런 그의 조그만 원구에 사랑이 있고 가족이 있고 자연이 있고 노동이 있고 요동치지 않는 고뇌의 고요와 평화가 있다. 마지막 양파를 수확하고 혼자 식사를 준비하는 시인. 그는 짧은 겨울 햇살처럼 빛났다 사라지는 빨간 새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따스하게 간직한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현자의 조그만 우주가 환하다. 문득, 파란 콩과 새우 요리를 하고 싶어지는 저녁이다. 임혜신<시인>

<Li- You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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