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93)제33대 Truman 대통령⑦

2018-02-02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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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93)제33대 Truman 대통령⑦
FDR 밑에서 Truman 보다도 먼저 부통령을 지낸후 또 Truman 정부에서는 상무장관 으로 일하면서 Truman 정책을 비난하다가 파면이 되었던 Henry A. Wallace 와 그의 추종자들이 민주당을 탈당하여 Progressives (진보당) 를 창당하고 Wallace 를 대통령후보로 공천 하였다. Wallace 는 미국내와 전세계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은 손을 맞잡고 협력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미국의 공산당도 Wallace 를 지지하였었다.

진보당은 강령으로 징병제도폐지, 강력한 민권법들, Russia 와의 협조, 원자탄 금지, 미국의 폭탄자진 분쇄, 공산주의자 들에게 언론과 정치활동의 자유를 허락할 것 등을 주장 하였다. 한마디로 민주당은 선거를 앞두고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여론조사는 Dewey 가 국민들의 지지를 더 받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공화당원들은 공개적으로, 민주당원들 중에서도 귓속말로 Truman 이 낙선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대도시 신문들은 Truman이 낙선할 것이라고 예측하고들 있었다.


이런 와중에 Truman 은 도전적이면서도 뱃짱 좋게 제80차 하원을 특별회기로 소집 하고서 공화당이 다수인 하원이 공화당의 선거공약으로 내어놓은 주요사항들을 입법 하라고 요구하였다. 하원이 입법을 하나도 하지 못하자 Truman 은 선거내내 하원을 “Do nothing Congress” 라고 비난하였다.

마치 선거운동을 Dewey 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원을 상대하고 있는것 처럼도 보였었다. Truman 은 제80차 하원이 Taft-Hartley 법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이 착취 되도록 하였으며 대기업만을 위해서 일해왔고 유럽의 난민들에게 문을 닫아 버림으로써 모든 이민들을 박해 하였다고 비난하였으며 민권법들의 제정을 촉구하여서 흑인들의 지지를 받았었다.

사면초가에서 승리하는 Truman 과 두각을 내기 시작하는 Nixon 하원의원 Truman 은 국민들에게 감명을 줄 정도로 열열히 선거운동을 하고 다녔다. 그는 기차로 전국 3만 마일을 누비고 다니면서 정거장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356 차례나 기차 위에서 연설하였으며 모두 1,200 만명의 사람들을 만났었다고 한다.

반면 점잖은 성격의Dewey 는 마치 대통령에 이미 당선이나 된것처럼 공식적인 연설을 하고 다녀서 사람들은 그가 차다는 인상을 받았었었다고 한다. 1948년의 선거에 처음으로 TV 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Dewey 는 어색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던 반면 Truman 은 활달하고 친근감이 있어 보였었다고 한다. 대통령선거가 연기 좋은 사람을 뽑는 대회는 아니지만 Dewey 는 많은 손해를 보았었다고 한다.

선거 다음날 아침에 조간신문인 Chicago Tribune은 일부의 조기 개표결과를 보고 1면에 “Dewey had won” 이라는 “특종오보” 를 top 기사로 내었었다. 개표가 완전히 끝난후 자신이 당선된것을 확인한 Truman 이 미소를 지으며 Chicago Tribune 을 읽고 있는 유명한 “특종사진”이 딴 신문들의 1면에 나왔었다고 한다.

이 선거에서 Truman 은 2,400 만표를, Dewey 는2,200 만표, Thurmond
와 Wallace 는 각각 100 만표를 얻었었다. 선거인단 표수로는 Truman이 303 표, Dewey 는 189 표, Thurmond는 39 표, Wallace 는 0표를 얻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Truman
의 “치맛바람” 에 휩싸여 민주당은 하원에서 93 석의, 상원에서는 12 석의 다수당이 된 것이었다. 아마 Truman 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한 선거결과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Truman 의 제2차 임기 4년동안에 국내외적으로 큼지막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데 그때마다 그는 신속하고도 과단성있게 일어나는 사태를 처리하여 그의 대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미국내에서는 공산주의의 침투를 우려하던 국민정서에 편승한 히스테리적인 “공산주의자 소탕작전” 이 난동을 치고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패배하여 대만으로 도주하는 일이 있었고 쏘련의 원자탄 실험이 성공하였다. 미국은 공산주의 쏘련의 세력확장을 막기 위하여 사방으로 방위동맹을 맺어야 하고 있던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었다. Truman 은 매번 용감하고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었으나 미국국민들이 그의 정책에 항상 찬동 했던 것은 아니었었다.

Truman은 그의 당선은 그가 FDR 의 New Deal 정책들을 많이 닮은 Fair Deal 정책들을 내어놓은것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막상 그가 Fair Deal Laws 의 입법을 국회에 요청하자 여야당 모두가 반대하는 경우도 많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가지 중요한 Fair Deal 입법을 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시간당 최저임금이 40전에서 75전으로 87.5%를 올렸으며 Social Security 가 천만 명에게 더 널리 적용되도록 하였으며 대도시의 빈민굴을 쓸어내고 저소득층 주택들이 건설되도록 하였으며 TVA 사업에 정부의 투자를 늘였고 농촌에 전기가 공급 되도록 하였다. 수력발전, 홍수조절, 농수로 개발 등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권확대, 국립건강보험, Taft-Hartley 노동법폐지, 연방정부의 교육비 지원, 농촌수입의 하락 방지정책의 수립 등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국립건강 보험제도는 아직까지도 채택되지 못한 상태에서 현 Trump 대통령은 한심스럽게도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70여년전의 Truman 대통령이 선각자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중과 종전후에 미국이 쏘련과 경험하게되는 갈등위에 1946년에 Canada 에서 국회의원까지 관련이 되었던 간첩사건이 발각되자 미국 국민들은 공산간첩의 침투가능성에 극히 예민하게 되었었다.

뚜렷한 증거도 없으면서 미국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을 공산화 하려는 음모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었다. 개인적으로 소련을 불신하고 있었던 Truman 도 국민들의 정서에 편승하였었다.

1947년 3월에 Truman은 FBI 와 공무원관리 위원회 (Civil Service Commission)
에게 모든 연방공무원의 미국에 대한 “충성심” (loyalty) 을 점검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는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충섬심이 증명될때 까지는 의심을 받을수 있다는 격이 되어서 아주 사기가 떨어지도록 만드는 명령이었었다. 명령이 내린후 4년동안에 연방공무원 300만명은 통과하였고 2,900명은 자진 사임하였으며 300명은 충성심이 의심된다고 해서 해임되었었다.

문제는 심사의 기준이 너무 막연하여 인사 처리된 사람들중에는 전혀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었던지 아니면 전쟁전에 공산주의자 이었던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1947년 12월에 연방검찰 총장은 미국에 불충성스러운 것으로 의심된다는 90개의 단체 명단을 발표 하였는데 이 단체들은 자기들이 “충성스러운” 단체라는 것을 입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었고 이 단체 회원들은 일단 공산주의자들 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었다.

“반공과 국가안보” 라는 명목으로 호들갑을 쳤던것은 일부의 국민들과 행정부만도 아니었었다. 제80차 하원도 덩달아서 공산주의자 소탕에 발맞추어 춤을 추었었다. 그전부터 존속해오던 “반미활동 조사위원회” (HUAC: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에 새로운 활력이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이 조사위원회에서 가장 유별나게 활약을 했던 사람이 California 주 출신의 젊은 Richard M. Nixon 하원의원이었고 Robert F. Kennedy 라는 젊은 변호사도 이 위원회의 조사관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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