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 역사 (192)제33대 Truman 대통령⑥

2018-01-26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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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서독정부의 수립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서부 Berlin 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 하였다. 1948년 6월에 소련은 서부 Berlin 과 서독간의 철도, 도로, 운하등을 통한 모든 통행을 금지시켰다. 총격전등 열전이 없이 실질적인 전쟁을 하는 “냉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Truman 은 자신이 백악관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 소련에게 굴복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미영불 3국은 하루에 4천톤씩 서부 Berlin에 모든 생활 필수품을 공수하였다. 1949년 5`월 12일에 서방국가들은 서독의 기본법을 허가하였다. 같은날 Stalin은 소련의 서독수립 방지수단이 실패로 돌아간것을 자인이라도 하였던 것처럼 서독과 서부 Berlin 간의 통행 금지를 해제하였다.

1949년 9월부터 서독은 외교와 군사는 미영불에 마끼면서 자치를 시작하였다. 그 한달후 소련은 동독 (German Democratic Republic)을 수립하였다. 1955년에 서독은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으나 동독은 계속해서 소련의 위성국가로 존속하게 되었다.


Berlin 봉쇄와 서독의 독립, NATO 의 설립과 분열끝에 두 대통령후보를 내는 민주당
동독사람들이 서부 Berlin 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61년에는 “철의 장막”을 상징하는 Berlin Wall 이 건축되었었다. Hitler 의 “천년왕국”은 결국 동서독으로 분활되었 었는데 유럽의 평화가 다시 파괴 되기전에는 독일은 분명히 한국처럼 영구 분단국가로 계속될 것으로 생각되었었다. 오늘의 통일된 독일에게서 남북을 통틀어 우리의 국민들과 위정자들은 배워야 할 점들이 무척이나 많다.

결국 소련의 어리석은 Berlin 봉쇄전략은 서방국가들을 경각시키고 단결하게 만들어서 미국과 Canada 가 Norway 에서 Portugal 에 이르는 유럽 10개국과 1949년 4월4일에 Atlantic Pact (대서양조약) 가 조인되도록 하였으며 이 조약에 따라 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가 설립되었다.

추후 Greece, Turkey, 서독등이 참가하여 모두 15개국이 회원국인 거대한 반공 방위동맹체가 되었다. 이조약 제5항의 규정에 따라서 NATO 회원국 어느나라든지 공격을 받으면 모든 회원국들은 자국이 공격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동맹체가 된것이었다. 미국의 헌법은 대통령은 상원의 동의를 받은후에야 선전포고를 할수있게 되어 있는데 상원은 이 권한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오는 전통이 있다.

이 권한이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때문에 미국상원은 1919년에 UN의 전신인 League of Nations 의 조약비준을 거부 했었다고 한다. NATO는 League of Nations 보다 훨씬 더 동맹관계가 분명하게 규정된 것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후의 냉전에 신경과민이 되어있던 미국의 상원은 1949년에 82 대 13으로 대서양조약을 비준하였었다. NATO 가 무엇이라고 호칭되었던 간에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실질적인 평화시의 “방위동맹”에 가입한 것이었다.

Eisenhower 장군이 NATO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1951년초 Paris 에 SHAPE (Supreme Headquarters Allied Powers in Europe) 을 설립하였다. Berlin 의 육로 통행금지로 미쏘의 대립과 유럽의 정세가 불안해져 가고 있던 1948년에 미국은 대통령을 포함한 총선거를 하게 된다. 차츰 더 심각해져가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소련간의 대립으로 또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을가 라고 걱정하는 미국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도 부분적인 상품부족과 사방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던 노조의 파업들 때문에 집권한 대통령은 “억울한” 비난을 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1946년에 이미 오랫만에 어렵게 겨우 다수당이된 공화당은 인심이 공화당쪽으로 돌아가고 있다고도 생각하였다. Truman 을 낙선시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으로들 생각하는 공화당 정치인들이 많았었다.

공화당 대표격으로 활약을 하여서 “Mr. Republican” 이라고도 불리워지던 Robert A. Taft 상원의원을 선두로Minnesota 의 Harold Stassen 주지사, California 의 Earl Warren 주지사, 1944년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이었던 New York 의 Thomas E. Dewey 주지사 등이 경쟁을 하였었다. 공화, 민주 양당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 Eisenhower 장군을 후보로 옹립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출마를 고사하였었다고 한다.


공화당에서는 일부 미국민들간에 반 FDR 의 mood가 조성되어 가고 있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New Deal 정책에 너무 강성 비난발언을 많이 해온 Taft 상원의원은 대통령 당선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 하였다. 결국 공화당은 온건파인 Dewey 지사를 다시 한번 더 대통령 후보로, Warren 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공천하였다. New York와 California 지사들이라는 동서의 결합으로 완전한 team 이라고 생각되었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공화당의 선거공약에 그때까지 미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여러 가지의 New Deal 개혁정책들을 지지 하는것이 포함되었었다는 점이다. 또 진주만 피격 이후로 외교정책은 여야 합의로 한다는 전통 비슷한것이 시작되어서 대통령 후보자들은 외교문제에 대한 쟁론을 피하고자 하였다. 사실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어떤 방법으로 대처할것인가 라는 문제는 그때 미국이 당면한 중요한 사항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중에 그 문제로 공개적인 쟁론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Truman 이 출마하면 낙선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민주당에도 많이 있었었다. 여러명의 중진급 정치 지도자들이 출마 하겠다고 나섰는데 정치성향들이 Truman 과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던 까닭에 민주당은 크게 혼란되고 분열이 되었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민주당의 공천대회에서 투쟁성이 강하고 항상 자신만만해 보였던 Truman 은 현직 대통령이라는 강점도 있어서 제1차 투표에서 거뜬히 대통령후보로 공천되었었다. Truman과 친하였던 Alben W. Barkley 상원 원내총무가 부통령 후보로 발탁되었다.

민주당은 노동자들의 원성을 듣고 있는 Taft-Hartley Act 를 폐기 하겠다고 하였으며 선거공약에 Palestine 에서 고전하고 있는 신생국가 Israel 의 승인, 강력한 민권법들의 입법, 연방선거에서의 투표권세금 (Poll Tax) 의 금지, 전국적인 Lynching 금지법, 공정채용법, 군대 내에서의 인종차별금지 등을 포함시켰는데 이중 일부는 Truman 이 이미 대통령 으로써 실행해 오던것들이 었었다. 민주당은 흑인들의 계속적인 지지를 받기 위하여 정성을 드렸었는데 북부의 여러 대도시에서는 흑인들의 표수가 많았었으며 그들의 표가 그주에서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공약에 포함된 민권옹호주장은 동시에 가장 민주당을 혼란시키고 분열시키는 문제로도 되어가고 있었다. 민주당의 선거 공약중에 민권법 제정등이 포함되자 남부주 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공천대회가 끝나기도 전에 Mississippi 와 Alabama 주 대의원들 35명이 퇴장하여 버렸다.

민주당 공천대회가 끝나고 이틀후에 남부의 13개주 대의원들은 Alabama 주의 Montgomery 에 모여서 그들만의 민주당 공천대회를 열었는데 회장에는 남북전쟁때 패망한 남부국기가 휘날리고 남부국의 반란적인 옛구호들을 큰소리로 웨쳐되고 있었다.

그들은 남부주인 South Carolina 의 J. Strom Thurmond 지사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은 “주정부권한 옹호자” (State Rights Democrats) 라고 주장하면서 “Dixiecrats” 라고도 자처 하였었다. 그들의 정강에는 연방정부의 영향에서 벗어난 주정부의 권한유지를 주장하였고 민주당의 민권옹호를 규탄하고 흑백간의 인종차별을 존속 시켜야 한다고 되어 있어서 공화당의 정강과 차이가 별로 없어 보였었다. 민주당의 분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었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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