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병적 포비아’를 퍼뜨리는 정치

2018-01-17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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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지나면서 부쩍 늘어난 것 가운데 하나가 방송의 시사토론 프로그램들이다. 대개 보수와 진보 양쪽을 대표하는 논객들이 나와 다양한 사회정치적 이슈들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토론자들은 대부분 이슈들에 대해 이견을 보이다가도 결국은 접점을 찾아간다.

그런데 북한 문제, 특히 핵위협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끝난다. 보수논객들은 북한의 위협을 즉각적이고도 거대한 위험으로 인식하는 반면 진보논객들은 관리 가능한 것으로 본다. 그러니 대응방식에 있어서도 입장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정치적 성향 문제를 오래 연구해온 예일대 사회심리학자 존 바악(John Bargh) 교수에 따르면 어떤 환경과 상황에 의해 신체적으로 얼마나 위협과 두려움을 느끼는지는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과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물론 보수적인 사람일수록 이런 위협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이런 분석으로 볼 때 북한 문제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 사이의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간극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뇌 과학의 도움을 받아 뇌를 최신기법으로 촬영해보면 그런 차이가 영상으로도 확인된다. 보수적인 사람일수록 전반적으로 뇌의 공포심 관장 부위인 ‘편도’(아미그달라, amygdala)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진보적인 사람들은 역겨움을 관장하는 부위인 ‘뇌섬’(인슐라, insula) 부위가 발달해 있다.

과학을 통해 밝혀진 이런 사실들은 왜 보수와 진보정치인들이 같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고 유권자들에게 상반된 메시지로 접근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보수의 입장에서는 유권자들이 상황을 두렵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하다.

반대로 진보는 그런 위협과 위험을 관리 가능한 것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진실은 중간 어디쯤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정치는 유권자들의 뇌 반응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두려움과 공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보수의 일반적 특성이라지만 트럼프의 경우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 그는 반이민 정서를 부추기는 캠페인으로 백악관에 입성했으며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러한 언행을 지속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중미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겨냥해 “우리가 왜 시궁창(shithole) 같은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을 받아줘야 하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도돼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대통령으로서 절대로 해선 안 될 말이지만 트럼프의 평소 성향을 볼 때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트럼프는 ‘세균혐오자’(germphobe)이다. 이건 그가 자기 입으로 밝힌 사실이다. 그는 집안일 하는 사람들이 자기 물건에 손대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세균의 위협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심리는 이민에 대한 거부감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트럼프가 국경장벽에 집착하는 것은 ‘세균혐오자’라는 그 자신의 고백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트럼프 이너서클의 부정적 내막을 폭로해 화제가 되고 있는 책 ‘화염과 분노’를 쓴 마이클 울프는 트럼프가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를 가까이 하는 데는 음식독극물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이라고 폭로했다. 상식적인 수준의 심리상태는 아니다.

문제는 이런 비상식적 공포가 개인적 행위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정치적 수단으로 동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극우 정치인들이 종종 이민자들을 세균이나 박테리아에 비유하는 등 ‘시궁창 수준’의 발언을 내뱉는 것은 그 자신들의 두려움을 표출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지계층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이민과 테러의 위협 등 ‘포비아’를 확산시킴으로써 표를 더 얻으려는 동기가 작용하고 있다.

‘병적 포비아’를 퍼뜨려 당파적 이득을 취하려는 ‘시궁창 정치’가 지금 미국과 온 세계를 멍들게 하고 있다. 이것을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병적 포비아’와 ‘합리적 두려움’을 구분할 줄 아는 유권자들의 분별력뿐임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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