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염과 분노’ 속의 백악관

2018-01-09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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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부터 백악관이 화염과 분노 속에 휩싸였다. 마이클 울프가 쓴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라는 책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6개월 동안 백악관을 출입하며 200명의 백악관 관계자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쓰여진 이 책은 트럼프 백악관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나타난 트럼프와 그 가족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트럼프는 무지하며 멍청하고 자기만 알며 친구의 아내를 탐하는 소아병적 인물로 묘사돼 있고 그의 가족들은 버릇없고 무지하며 멍청한 인간들로 그려져 있다.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이 책에 따르면 원래 트럼프는 대선에서 이길 생각도, 이길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대선에 출마해 인지도를 높이고 이를 이용해 자기 브랜드 가치를 높이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의 보좌관들도 그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으며 트럼프 스스로 아내 멜리니아에게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선거 당일 저녁 예상 밖으로 플로리다와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등 동부 지역에서 그가 이기면서 분위기가 달라졌고 그의 승리가 확정되자 멜리니아는 기쁨의 눈물이 아닌 슬픔의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딸 이방카는 보좌관으로 백악관에 입성한 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대통령에 출마하겠으며 첫 번 째 여성 대통령은 힐러리가 아니라 이방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울프의 주 소스의 하나인 스티브 배넌은 트럼프의 아들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를 경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배넌은 러시아 변호사와 만난 도널드 주니어를 “반역적”이고 “비애국적”이라고 불렀으며 러시아 스캔들 수사관들이 “전국 TV에서 주니어를 계란처럼 깰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트럼프의 부하와 보좌관들조차 그의 정신 상태와 지적 능력을 비웃고 있는 것으로 묘사됐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그를 “바보”(moron)라고 불렀으며 스티브 므누신 재무 장관은 그가 “백치”(idiot)라고 말했다. 울프에 따르면 트럼프는 “광대들에 둘러싸인 백치”로 한 페이지짜리 메모를 비롯해 아무 것도 읽으려 하지 않으며 사위 쿠슈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고 배넌은 자기가 사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건달이다.

취임 당시 트럼프의 연방 헌법에 대한 이해는 백지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책의 저자는 전 보좌관이었던 샘 넌버그를 인용해 유세 기간 중 연방 수정 헌법 제4조까지 트럼프에게 설명했으나 그 다음은 그가 통 관심을 보이지 않아 더 나갈 수 없었다고 밝혔다.

울프는 또 트럼프가 맥도널드 햄버거를 잘 먹는 것은 이것이 미리 제조돼 독이 들어 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런 내용으로 가득 찬 책에 트럼프가 분노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의 변호사들은 이 책의 출간을 막기 위해 출판사 측에 편지를 보냈으나 출판사는 오히려 출간 일자를 앞당겼다. 지금 서점과 아마존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이 책은 올해 최고 베스트셀러의 하나가 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트럼프 측은 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는 것도 검토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제로다. 연방 수정 헌법 1조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대통령 후보 시절 명예 훼손법을 수정해 잘못된 정보를 공표한 저자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물리겠다고 공언했으나 지금은 이 말도 쑥 들어갔다. 아무리 공화당이 다수인 의회지만 이런 법이 통과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제는 “가짜 책”(Fake Book)까지 참아야 하느냐며 한숨만 쉬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울프는 원래 정치인을 취재해 무자비하게 비판적인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왜 백악관이 이런 사람에게 문을 열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게 했는지 미스터리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책 내용이 ‘누가 뭐라고 말했다더라’ 식의 가십성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사실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며 정책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고 비판하고 있으나 트럼프 백악관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 것만도 나름 의미가 있다. “가짜 책”이라는 트럼프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도의 디테일을 조작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의 모습이 딱하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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