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민주주의 위협하는 ‘주적’

2017-12-06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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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크 루소는 1755년 펴낸 자신의 책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회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는 경제적 불평등이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갈파했다. 경제적 불평등은 권력의 불평등을 만들고, 권력의 불평등은 가난한 사람들을 권력에 복종하고 예속되는 ‘노예’로 만들어 궁극적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자유의 불평등’으로 귀결된다고 본 것이다. 루소의 진단과 예언은 262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을 비롯한 수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사회현실이 되고 있다.

한국의 새로운 정부 출범 후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는 문제가 바로 경제적 불평등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밥이 곧 민주주의”라고 했는데 이는 경제적 민주주의 없이 정치적 민주주의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경고이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경제학자들은 약자의 요구가 불온한 불평으로 취급되면서 다수의 시민들이 주어진 사회적 경제적 구조에 복종하는 민주주의의 후퇴가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계층이 정책과 여론의 흐름을 결정하고 지배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한 사람의 큰 부자가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500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있으며 소수의 풍요로움은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한다”고 꼬집은 바 있다. 소득 불평등이 사회의 불안정성을 키운다는 증거는 넘쳐난다.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는 것은 물론, 살인 등 범죄가 늘어나고 자살률과 이혼율, 우울증 관련 통계수치가 치솟는다.

불평등의 위험은 진화론적으로도 설명된다. 진화심리학자 마틴 데일리가 미국 50개주와 캐나다 10개주의 소득 불평등과 살인 발생률 간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결과 불평등이 심한 주일수록 살인이 더 많이 발생했다. 데일리는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위험을 무릅쓰고 큰 것을 노리는 고위험 전략이 득세한다”고 불안정성을 설명한다.

지난 대선에서 북한을 놓고 뜨거운 주적 논쟁이 벌어졌지만 20년 후 30년 후 대한민국을 정말 위협하고 위험에 빠뜨릴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북한은 머지않아 스스로 붕괴되겠지만 불평등은 지금 강하게 누르고 억제하지 않는다면 통제할 수 없는 괴물로 자라 한국사회를 삼켜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불평등은 저절로 해소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를 억제하고 뿌리 뽑을 수 있는 주체는 오로지 정치뿐이다.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차가운 사실이다. 가진 사람들과 재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을 얻고 생각이 바뀌어서 “가진 것을 같이 좀 나눠 불평등을 해소하자”고 자발적으로 나설 리는 만무하다.

정치권이 불평등 해소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도록 채찍질할 수 있는 것은 국민들이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불평등에 분노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할 사회 최하위 계층들이 정작 정치적 선택에서는 불평등 조장 세력에 표를 몰아주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다. 이것이야말로 경제적 불평등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가를 생생히 실증해주는 사례라 봐도 무방하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정치권이 나서 증세논의를 주도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등 불평등 완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고 안타깝다.

미국의 불평등 지수는 이미 선진국들 가운데 최악이다. 트럼프가 밀어붙이고 있는 감세안은 그럴듯한 명분과 포장에도 불구하고 소득격차를 더 벌려놓게 될 것이 뻔하다. 최근 연방의회 예산국 보고서는 감세안이 가난한 계층에 타격을 입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민들에게는 푼돈 쥐어주며 부자들에게는 목돈 챙겨주는 감세안이 초래할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불평등이 방치될 경우 미래에 대한 전망은 암울할 수밖에 없다. 불평등은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민주주의는 형식만 겨우 유지한 채 위기에 빠지게 될 것이다. 미국의 장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주적 또한 국제사회가 아니라 바로 미국사회 내부에 있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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