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을 욕되게 하는 ‘신앙인들’

2017-11-29 (수) 조윤성 논설위원
작게 크게
“그리스도교는 개념만의 종교도, 순수한 신학의 종교도, 미학의 종교도, 계명의 종교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백성으로서,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길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증거가 때때로 생명을 내어놓게 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지난 2014년 한 강론을 통해 이 같이 말했다. 교황의 이 말은 가톨릭만이 아닌, 모든 종교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증거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신앙인이라는 가르침이다.

‘증거하는 사람’은 행동으로서 믿음을 보여주는, 즉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이른다. 인간들이 속성으로 가지고 있는 약점과 연약함 때문에 완벽한 신행일치의 삶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불완전한 가운데서도 항상 끊임없이 세속에서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게 교황 강론의 핵심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학술세미나들의 주제도 이것이다.


한국교회와 미주한인교회들은 세계 도처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등 선교에 무수한 자원을 쏟아 붓고 있다. 이런 선교의 핵심 역시 ‘신행일치’여야 한다. 교회를 세우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결국 핵심은 사람들의 삶속에 들어가 봉사하고 헌신함으로써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가 기본이 돼야 하는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서 인권을 유린당한 채 힘겹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 제3세계 선교뿐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비슷한 처지로 고통 받는 우리 이웃들에 대한 전도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실제로 신앙과 행위의 일치를 추구하면서 믿음의 전파에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위축, 특히 기독교의 위기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교세가 약화되고 있는 것은 물론 기독교에 쏠린 사회적 시선도 별로 따스하지 않다. 심지어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처지가 된 것은 믿음과 행동이 완전히 다른 궤도를 달리는 일부 신앙인들의 ‘신행불일치’가 무수한 노력과 희생을 무위로 만들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저명한 목회자들의 타락, 그리고 평소 신실한 신앙을 자랑해왔던 유명인사들의 위선적 행위는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이러스처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최근 공관병 갑질로 구설에 올랐다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박찬주 대장과 그의 부인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들은 평소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을 정도의 돈독한 신앙인으로 알려져 왔다. 박 대장은 한 간증을 통해 “초코파이로 전군을 복음화 할 수 있다”며 선교에 불처럼 타오르는 열정과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가 아들 뻘인 공관병들을 대한 태도에서는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징표인 사랑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초코파이로 아무리 달콤한 선교를 한다 해도 믿음에 어긋나는 행위들이 초래하는 부정적 효과를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신앙인들이 이 같은 위선을 경계해야 하는 건 사람들이 결정을 내릴 때 부정적 생각에 더 큰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업소에 대해 별 다섯 개짜리 호평과 별 한 개의 악평이 함께 오른다면 부정적 평가가 소비자들의 결정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종교를 대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종교학자들은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과 행위가 전혀 딴판인 신앙에 대해 ‘실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겉으로는 신실한 체 하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는 마치 신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위선을 꼬집은 것이다. 별 한 개짜리인 이런 ‘실제적 무신론자’들이 너무 많이 눈에 띈다는 것이 요즘 종교의 고민이요 문제다.

<조윤성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