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박대희목사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70년대 초 내가 하와이대학교 역사학과에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당시는 1965년 새 이민법이 채택되어 하와이에 오는 한인 이민자의 수 가 1969년부터 급증하고 있었다.
한인 이민의 제2차 물결이 일어난 것이다. 하와이 이민 제1차 이민 물결은 1903-1905년 약 7,000여명의 한인들이 주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온 것이다.
박대희목사님은 1962년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한어담당 목사님으로 취임하셨다. 당시 한인사회에 큰 세대교차가 일어나고 있었다. 제1세대 한인 선배가 사라지고, 그의 후손 2-3세대가 한인사회를 주동하고 있었다. 박목사님은 이 역사적 전환기에 중요한 다리의 역할을 하셨다. 구세대와 신시대를 연결시키고, 새로운 지평의 한인사회를 인도하셨다.
박 목사님이 처음 취임하셨을 때 그리스도 감리교회는 사실 대전환의 기로에 서 있었다. 세대교차로 한국말을 할 수 있는 교인들이 격감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영어를 주로 쓰는 2-3세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에 장래 발전을 위해 교회를 한국어를 쓰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개방하라는 압박이 교단본부에서 왔다.
다른 일본 필립핀 등의 감리교회 이름도 변경하였다. 그래서 1968년 교인들이 격심한 논의 후 교회의 이름을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로 바꾸었다. (한 노인은 한국사람 이름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이런 와중 1971년 박목사님이 교회 담임 목사님으로 취임하신 것이다.
새로운 이민으로 교회는 새로운 활력이 소생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동시에 교회는 새로운 문제를 당면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봉착하는 문제인데, 이역에서 정착하기 위해 직장을 구하여야 하고 자식교육을 하여야하는데, 이는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이민자들에게는 크게 어려운 일이었다. 박목사님은 이들을 위해 직장을 구해주고 다방면에 도움을 주셨다. 교회에 Pre-School을 설립하여 부모들이 걱정 없이 직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1970년 박목사님은 새로 이민해온 자제들을 위하여 한인사회학교를 설립하였다. 매주 토요일 오전 교회를 공개하여 한인 자제들이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문화를 배우도로 한 것이다. 수많은 자제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한국말과 문화를 이해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에 한인사회가 맞은 가슴 앞은 역경은 청소년문제였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상당한 한인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미국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그 중 일부는 심지어 “깡패‘와 같은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도우기 위해 박 목사님은 이덕희와 나와 상담하여 생각한 것이 Korean Youth Program이었다. 1981년 교회에 Korean Youth Program을 설립하여 김유경을 인명하여 청소년의 방과후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영어 보충교육, 체육, 음악 등을 마련하였다. 박목사님이 하와이를 떠나신 후 교회에서 이 프로그람을 그만 두라는 지시가 있어 Korean Youth Program은 YMCA소관으로 이적하여 10여년을 운영하였다. 당시 문제의 청소년조직의 두목이 김인성(배호)이었다. 그는 지도력이 매우 강하여 많은 청소년들이 쫓아다녔다. 박목사님과 나는 이를 선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경찰과 사직당국에 호소하여 도우려고 하였다. 그 후 김인성군은 인생의 완전한 탈바꿈을 하여, 현재 캄보디아에 가서 거기에서 청소년을 위한 교육과 의료후원의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박 목사님의 수많은 업적 중에 기억하여야 할 또 하나는 1978년 하와이에서의 한인인권투쟁이다.
그 해 8월 호놀룰루의 스타블루틴이 연 3일 동안 특종기사로 “Hostess Bars"라는 제목으로 호놀룰루에 있는 많은 술집영업소를 한국인의 이름과 연관 시켜 한인들의 명예와 체면을 손상시켰다. 이 기사는 당시 주지사 선거를 위한 미국 민주당 예비선거와 결부시켜 한국인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위험이 있었다. 이에 한인들이 단결하여 한인인권투쟁위원회를 설립하여, 김하인장군을 위원장으로 선정하여 스타블루틴 신문사에 항의를 전개하여, 결국 신문사가 공식적으로 한인사회 전체에게 사과하게 하였다. 이 운동의 중신 인물의 한 분이 박 목사님이었다. 그 후 하와이의 야간 업소들의 이름에서 한국인 이름이 없어진 것이다.
박 목사님은 나의 목자가 되어주셨고 나의 형님이며 친구가 되어주셨다. 내가 목사님과 같은 시대에 인생을 같이한 것은 나의 큰 영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