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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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따라 16마일, 12시간 자연의 속살을 걷는다

2017-11-17 (금) 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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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ast Fork Traverse (San Gabriel River 상류의 흐름을 따라 Vincent Gap에서 Heaton Flat까지)

▶ 이른 새벽 숲에선 촉촉하고 진한 나무와 낙엽 향기

물길 따라 16마일, 12시간 자연의 속살을 걷는다

East Fork을 건너는 모습.

물길 따라 16마일, 12시간 자연의 속살을 걷는다

Swan Rock.


물길 따라 16마일, 12시간 자연의 속살을 걷는다

‘Bridge to Nowhere’.


San Gabriel River의 ‘East Fork Traverse Hiking’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 것은 10년쯤 전인데, John W. Robinson의 책을 통해서 였다. 그동안 이런 저런 산행을 하면서, 가끔 Vincent Gap이나 Heaton Flat에 차를 세울 일이 있거나, 또는 Mt. Baden Powell의 정상에서 전망을 보게 될 때에는, ‘East Fork Traverse’에 대한 동경심이 일곤 했다. 그러나 이 코스를 종단해 본 사람을 알지 못하니, 누군가에게 이 하이킹의 안내를 부탁해 볼 수가 없었고, 나 홀로 미지의 영역인 이 계곡의 종주에 선뜻 나설 용기는 없는 지라, 막연히 이제나 저제나 하며 지내왔다.

헌데, 이런 나의 오랜 숙원을 풀 기회가 드디어 도래한다. Sierra Club의 HPS에서 이 하이킹을 한다는 것이다. 10년의 기다림에 대한 ‘Fortune’의 인도인 셈이라,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하이킹의 날로 정해진 10월1일(일요일)을 손을 꼽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마침내 하이킹 전날인 9월30일(토요일) 17~20시에 걸쳐 8인승인 내 차를 하이킹 종료지점인 Heaton Flat의 주차장에 미리 가져다 놓는다. 하이킹이 끝난 뒤에 주차해 놓은 차를 찾으러, 모든 대원들이 하이킹의 시작지인 Vincent Gap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다녀간, 이 하이킹의 주 리더인 Peter & Ignacia Doggett 부부의 차 1대가 미리 주차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지금 Prius를 타고 Vincent Gap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인데, 다른 멤버들과 함께 그곳에서 토요일인 오늘 야영을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등산동료인 서일우님이 자신의 차를 운전하여 이곳 Heaton Flat까지 동행한다. 내 차는 이곳에 세워두고 그의 차를 타고 LA 한인타운으로 되돌아 온다.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잠을 자고 잠시 뒤인 일요일 새벽에 다시 만나서 Vincent Gap으로 바로 가기로 한 것이다. Heaton Flat을 다녀오는 일은 왕복 90마일의 거리였고 대략 3시간이 소요됐다.

내일의 하이킹을 위해 준비물을 점검한다. 배낭에 찢어진 부분이 있다. 바늘과 실을 찾아 이를 꿰매고 나니 벌써 23시20분이다. 23시30분에 잠자리에 눕는다. 설레임이 커서인가, 아니면 오늘따라 우연히 커피를 과다하게 마신 때문인가, 단 1분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10월1일(일요일) 03시30분에 나를 데리러 온 서일우님을 만난다. 저녁을 함께 먹고 어제 밤에 헤어진지 불과 6시간이 지난 시각이다. 서로 “Good morning!” 이라며 인사를 나눈다. 잠을 못 이룬 상태로는 “Good morning!”이 결코 아니지만, 학수고대하던 대망의 하이킹을 하는 날이라는 의미에서는 확실한 “Good morning!!”이다. 날렵한 Civic에 우리 둘 다 잠이 결핍된 어둔한 몸을 싣고 깊은 밤을 방불하는 새벽을 달린다. Vincent Gap(6600’)에 도착한다. 05시 30분이다. 서일우님의 운전으로 90마일에 2시간이 걸렸다. 하이킹 출발 예정시각까지는 아직 30분이 남았다.

등산시작점인 주차장은 아직 깜깜하다. Peter 와 Ignacia는 이미 일어나 차 안에서 하이킹 준비를 하고 있다. 06:00이 된다. 산행준비를 다 끝낸 16인의 Sierra Club 멤버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두 리더가 하이킹을 하면서 지켜야 할 사항을 설명한다. 각자의 소개는 산행을 하다가 날이 밝으면 하기로 한다. Peter의 선도로 아직은 깜깜한 계곡을 향해 내려간다. Headlight의 불빛으로 어둠을 밀쳐내며 일렬종대로 보무도 당당히 행진한다. 깊고 어두운 갱도를 향해 내려가는 광부들처럼 또 미지의 정글에 들어가는 탐험대처럼 대원들의 기개가 자못 결연해 보인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계곡에는 진한 향기가 배어 있다. 나무에서, 낙엽에서, 물기에 젖은 순결한 대지의 보드라운 살결에서 솟아나는 신비로운 유현한 내음이다. 인적이 드문, 원시의 처녀림이라서 간직한 훈향인가?

서서히 어둠을 걷어내며 햇살이 다가온다. 계곡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꽃이 있고 열매가 있다. 푸르른 나무가 있고, 붉은 단풍이 있다. 노란 단풍도 아름답다. 새가 있고 나비가 있다. 바람이 흐르고 물도 흐른다. 산 봉우리는 높고 계곡은 깊다. 평지를 지나고 단애를 지난다. 물을 건너고 바위를 건넌다. 물에 젖고 땀에 젖는다. 감탄이 있고 긴장이 있다. 깨끗하고 균제된 아름다움이 있고, 온통 흐트러진 Chaotic Harmony가 있다. 서두름이 있고 느긋함도 있다.

2.2마일을 온 첫번째 Gully에서 각자가 소개된다. HPS의 정규멤버 외에 WTC의 멤버들도 5인이 동참한 것으로도 이 하이킹의 특별함이 드러난다. 대원들의 분위기가 매우 활기차다.


3.3마일에 계곡의 바닥에 이르른다. 부근에 찢어진 비행기의 잔해가 있다. 사고를 당했을 사람의 참혹함을 상상해 본다. 3.4마일 지점이다.

리더가 Mine Gulch Junction임을 알린다. 4마일 지점이고 고도는 4500’이다. 거친 협곡들인 Vincent Gulch, Mine Gulch, Prairie Fork의 물줄기가 모여 East Fork의 주된 흐름이 형성되는 발원지이다. 제법 많은 물의 흐름을 만나게 되는데, 이제 부터는 이 물흐름이 우리를 인도한다.

Fish Fork Stream이 동쪽에서 합수되어진 것은 7.9마일 지점이고, 서쪽에서 Iron Fork Stream이 합수되어진 것은 9.8마일 지점이다. 여기서 부터 2마일 구간이 좁고 험한 협곡인 ‘The narrows’이다. 11.5마일에 드디어, Heaton Flat쪽에서는 몇번 와 보았던, 아름다운 조형물 ‘Bridge to Nowhere’에 도착한다.

일체의 문명시설이 없이 오로지 순수자연인 계곡을 훑어 내린지 10시간만에 만나는 인간의 피조물이다. 자연훼손이란 시각도 있지만, 지친 몸이라서인지 이를 설계하고 건설한 사람들의 노고가 반갑다. ‘Mother Nature’도 이 교량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1938년의 대홍수에서 이를 지켜 주셨을 것이다. 대원 전체가 시멘트 교량의 매끈한 돌출부에 털썩 주저 앉아, 인간문명의 안락함을 누린다. 고도 2830’ 지역이다.

다시 일어나 더 넓어지고 더 맑아진 강물을 따라간다. 13.6마일에 문득, 가파른 수직의 절벽에 앉은 한마리 거대한 새가 눈에 든다. 높은 암벽면에 선명하게 드러난 지층의 문양으로 ‘Swan Rock’으로 불리운다. 창세의 신께서 손수 산의 암벽면에 상감식으로 새겨 넣은 하얀 백조가 완연하다. 우연한 지질현상이기 보다는, 자칭 만물의 영장으로 뻐기며 자연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우리 인류에게 던지는 조물주의 진지하고 심각한 수수께끼는 아닐까 상상해 본다.

12시간 30분이 걸려 Heaton Flat에 세워둔 차에 이른다. 16.4마일을 걸었다. 등반고도는 999’인데, 하강고도는 4560’인 하이킹이다. 생소하고 험한 Canyoneering을 통해 생소한 East Fork의 답사를 잘 마쳤다는 성취감으로 대원들 모두가 대단히 행복해 한다. 리더인 Peter와 Ignacia의 기쁨과 안도감은 더욱 클 것이다. 두 분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제 우리들 14인이 새로이 이 계곡의 이모 저모를 알게 되었으니, 리더의 보람이란 정녕 이런 것이리라.

16인의 대원들이 2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Vincent Gap을 향하여 출발한다. 안전속도를 잘 지키는 Peter를 뒤따라 Vincent Gap에 도착하니 2시간이 지나 21시가 되었다. 왁자지껄한 활기속에 서로 작별인사를 나누는 대원들을 뒤로 하고, 홀로 LA를 향해 차를 돌린다.

15번을 지나 10번 Freeway에 들어서면서 졸음이 밀려든다. 예상했던 일이다. 주유소에 들려 연료를 채우고, 바나나와 사과 1개씩을 집는다. 차를 옆으로 옮겨 세우고 요기를 한다. 잠시 눈을 붙일 요량으로 시계를 본다. 22시다.

이내 잠이 들었다가 깜짝 놀라 깨어난다. 10분쯤 지났을 것으로 느껴지는데, 시계는 03시를 가리키고 있다. 뭔가가 잘못됐나 싶다. 허나 시계는 틀리지 않았다. 썰렁한 차 안에서 내리 5시간을 잔 것이다. 집에 들어온 시각이 04시였다. 아내에게는 미리 이런 상황을 예견하여 귀가가 늦어질 수 있다는 언질을 남겼기에, 다행히 가족들의 걱정은 없었다.

이번 하이킹에 차로 이동한 거리가 약 360마일, 길에서 보낸 시간이 13시간이다. 물길을 따라 16.4마일의 계곡을 걷는데는 12시간 30분이 걸렸다. 일요일 03시30분에 집을 나와 월요일 04시에 집에 돌아왔으니, 24시간 30분만에 귀가한 셈이다.

정진옥 310-259-6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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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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