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지식하고 평범한’시민들의 지혜

2017-11-01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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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현명한가 아니면 우매한가는 근대 지성사를 쭉 관통해 온 철학적 질문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참극의 역사를 들어 대중의 광기를 우려하고 경계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깨어있는 대중에 의해 역사는 의미 있는 진전을 거듭해 왔다는 주장도 강한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니 대중이 우매한지 아니면 현명한지에 관해서는 무 자르듯 딱 잘라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편견과 휩쓸림 등 인간들이 지닌 취약한 속성은 대중을 대단히 불안정한 존재로 만들어주지만, 반대로 교육과 정보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 판단능력, 그리고 정의에 대한 선천적 민감성 등은 대중에 대한 신뢰의 원천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정치체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결정에 대중이 일일이 참여하기란 불가능한 일. 그래서 대리인들을 뽑아 하는 정치, 즉 대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이 방식은 날로 심각한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익히 보고 경험해 왔듯 주인과 대리인의 관계는 역전된 지 오래다. 정치는 국민들 이익이 아니라 금권의 영향력에 절대적으로 좌우되고 있으며, 옳고 그름이 아닌 진영논리가 정치인들의 사고와 발언을 지배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시민 471명이 2박3일간 합숙 토론을 한 후 표결을 통해 원전건설과 관련한 권고안을 결정했다. 정부는 이 같은 ‘공론조사’를 통해 나온 표결결과를 수용했다. 원전은 오랫동안 찬반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해 온 갈등사안이다.

여론조사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국민들의 의사를 정확히 묻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공론조사’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어떻게 시민들의 판단에 맡길 수 있느냐는 반발과 비판도 있지만 다른 방식, 가령 정부의 일방적 발표나 정치권 논의에 맡겼다면 원만히 결론에 도달했을지 의문이다.

대중은 일반적 통념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 우리는 흔히 전문가들을 아주 높여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이 좁은 분야의 지식은 뛰어날지 몰라도 폭넓게 보는 능력은 오히려 부족한 경우가 많다. 게다가 대부분 전문가들은 특정 이익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다.

지난 2002년 다니엘 카너먼과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버논 스미스는 시장모형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고지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처음에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잘 몰라 하다가도 결국에는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결말을 이끌어 낸다는 것을 밝혀냈다. 다양한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여 공익에 관련된 사안을 결정할 수 있다면, 시간이 갈수록 집단의 결정이 개인의 결정보다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뒤따른다. 구성이 다양해야 하고 토론에 필요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돼야 한다. 이번 원전 공론조사는 일단 이러한 전제가 상당히 충족된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안을 시민들의 토론과 표결을 통해 결정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갈등비용이 아주 크고 좀처럼 의견 접근이 이뤄지지 않는 채 헛돌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집단적 지혜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해봄직 하다.

여러 가지 미비한 점들이 드러나고, 평가 또한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공론조사는 ‘한국형 직접 민주주의’의 모델로 점차 확대 발전시켜 나갈만한 가치가 있다.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수준과 뛰어난 학습능력을 고려할 때 한국적 토양에 특히 적합한 모델로 보인다.

공론조사 합숙과 토론을 거쳐 투표를 마친 ‘고지식하고 평범한’ 시민들의 표정에서는 한결같이 뿌듯함과 자부심이 넘쳐났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찬반을 떠나 결과에 기꺼이 승복하는 태도들이었다.

눈 감고 귀 막은 채 자기 할 말만 쏟아내고 상대 흠집 내기에만 골몰하는 직업정치인들에게 시민들의 ‘숙의 민주주의’는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지지율 15%도 되지 않는 정당이 100석 넘는 의석을 앞세워 온갖 몽니를 부리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망가진’ 대의 민주주의 보완을 위해서라도 성숙한 시민들의 참여가 한층 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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