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제 막 대공황을 탈출하여 본격적으로 경기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자 대부분의 기업체들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이 일어나기전 까지는 미국이 전시체제로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었다.
노동자들도 다시 번영이 시작된 경제의 더 큰몫을 요구하기 시작하여서 1941년에는 노동쟁의가 평상시보다 다섯배로 늘어났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과 함께 미국정부는 미국이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무기제조 공장이 될수 있도록 경제를 전시체제로 바꾸어야 했었었다. 전시체제에서 부족해지는 물자들을 공평하게 공급하기 위하여 연료, 구두, 육류, 설탕, coffee 등등의 소비물자를 위해서는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국민들에게 배급전표가 주어졌다. Gasoline 도 배급품목이 었는데 gasoline 이 부족 하여서가 아니라 자동차 타이어에 들어가는 고무가 극히 모자라는 군수품목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무, 금속류, 종이등은 재활용을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의 배급생활은 그 당시 다른 유럽 국민들이 겪는 불편에 비하면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고 미군과 연합국들의 군인들이 미국의 모든 군수물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미국인들은 알고들 있었다. 경기가 호전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조금 더 여유를 갖기 시작하였고 실업자들이 거의 없는 시대로 돌아 왔었었다. 1942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총생산은 독일, 이태리, 일본을 합친것 보다도 더 많았으며 1944년에는 세나라를 합친 것의 두배에 달했었다.
WW I 중에 미국의 선박이 모자라서 고난을 겪었던 것에 비하여 1940년에서 1945년 사이에 미국의 조선회사들은 연합국들의 총선박 합계 ton 수의 3분지2 와 맞먹는 선박들을 조선해 내었다. WW II 가 아직 종전되지 않았던 같은 기간 동안에 미국은 비행기 25만대, 장갑차 10만대, 탱크 7만5천대, 대포 65만대, 포탄과 총알 수백만톤을 생산해 내었었다.
미국은 군인 총 1,500만명이 동원되었는데 천만명은 징병으로, 5백만은 지원병들로 충당되었었다. 미국역사상 처음으로 육해공군등 각군에서 대규모로 여성을 모집하여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것을 제외한 모든 병과에 여군들을 배치하였다. 1945년에 이르러서는 26여만여명의 여군들이 육군의 WAC 로, 해군의 WAVE, 해안경비대의 SPARS 로, 여성 해병대원등으로 복무하였다.
천여명의 여성 pilot 들이 민간기, 군용기로 군인과 군수물자들을 대서양 너머로 수송하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 했었는데 “여성차별” 때문에 미공군은 1979년까지 이들 “여성용사”들을 “War Veterans” 로 인정하지않아 그들이 Veteran 의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되었었다. “미국답지 않은” 얘기이지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6.25 한국전쟁때 참전했던 “학도의용병들과 이북 후방에 정보원으로써 침투하였다가 이남으로 돌아왔다던 PLO 등 일부 군번없는 군인”들이 불과 얼마전까지 종군군인으로서의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였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전쟁중의 인력난으로 사회진출과 지위향상의 기회를 얻는 여성과 흑인
전쟁중의 노동력 부족은 여성들에게 문호가 활짝 개방 되도록 하였다. 대공황중에는 여성들은 가정에 전념주부로 돌아가고 남자들에게 일자리를 내어주는것이 미덕으로 생각되었 었으나 전쟁중에 절대적인 노동인력이 부족해지기 시작하자 공장들은 직종을, 경험을 상관하지 않고 여성들을 고용 할수밖에 없었었다. 전쟁전에 1200만명의 여성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전쟁중에 600만명의 여성들이 추가 되었었다.
전쟁전에는 “연약한” 여성들에게는 너무 힘든일들 이라고 생각 되었던 벌목공, 용광로화부, 대장쟁이 등등의일들을 여자들이 척척해냈을 뿐만아니라 조선창과 비행기 제조공장에서 복잡한 기계들도 여성들이 직접 조작하였으며 의사, 치과의사, 화학자, 변호사등으로도 많은 여성들이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흑인여성들 에게도 문호가 개방되기 시작하였다. 인구중 일하는 여성들의 percentage 는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항상 더 많았었지만 대부분의 흑인여성들의 직종은 가정부등 저임금 하급노동직이 었었는데 전쟁중 약 50여만명의 흑인여성들이 봉급이 훨씬 더 많은 공장직원들로 채용되었으며 많은 여성들이 전쟁후에도 계속 일하게 되었었다. 전쟁으로 미국은 여성들의 능력을 발견하게 되었고 여성들도 자신들의 진가를 재평가 하게 되었었다.
차별을 받은것은 여성들만이 아니었다. 미군 1,500만명중에 100만명은 흑인들이 었는데 WW I 때 보다는 많이 그들의 지위향상이 되었었으나 여전히 부당한 인종차별이 있었었다. 미국 해병대가 처음으로 흑인들을 받아 드려서 종전쯤에는 1만7천명의 흑인 해병대원들이 있었으며 흑인조종사들도 많이 참전하였는데 그중 81명은 최고 훈장까지 받았었으나 그들 역시 각종의 인종차별을 받았었다고 한다. 자격이 있는 흑인들의 장교와 조종사 임명이 전보다 쉬워졌었다.
전쟁전에 해군은 흑인들을 주방병이나 waiter 로만 채용했었는데 전쟁중 여러 병과로 모병하기 시작하였었다. 그러나 전투함에서 가장 위험한 직책이라는 함포탄환 관리직에는 대게 흑인해군이 배치 되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훈련은 받아보지 못한 주방병 Dorie Miller 라는 해군용사가 진주만 공격때 목숨을 걸고 기관총을 쏘아 일본전투기 4대를 격추하여 최고 훈장을 받은 예도 있었다.
흑인부대들이 창설되어 각지역의 전투에 투여 되었었다. WW II 중 일본군들이 Burma Road 를 봉쇄해 버리자 흑인공병대대가 북 Burma jungle 의 상상하기도 힘든 습기와 무더위 속에서 “Lido Road” 라는 새 수송도로를 건설하였다. 흑인 군의관Charles Drew 는 전쟁중 혈액은행 제도를 개발하여 Blood Plasma (혈청) 을 보관했다가 수많은 전상자들의 생명을 살려 내었었다. 미군은 아무런 과학적인 근거도 없이 또 Drew 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백인과 흑인의 Blood Plasma 를 분리해서 보관하고 썼었다고 한다. 흑인들은 자신들의 인권을 공평하게 보장해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전장에서 목숨을 동등하게, 때로는 더 위험하게 내놓았었다.
Truman 대통령이 1946년에 인종차별 철폐를 추진할 위원회를 임명하였었고 1949년에 육해공군에 인종별 quota 제도가 없어졌으며 1950-53 년간의 한국전쟁때 처음으로 인종차별없이 흑백군인들이 나란히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었다고 한다.
WW II 중의 미국의 인력난은 흑인들에게 조금 더 문호가 개방 되도록 하였으나 동시에 흑백갈등이 더 표면화 되게도 하였지만 흑인들의 지위향상에 도움도 되었다. 그때 까지도 80%는 남부에서 살던 흑인들이 공장 노동직들을 얻어서 북서부쪽으로 대거 이동하였다. 그 결과로 여러지역에서 인종간의 충돌이 일어났었는데 1943년에 Detroit 에서는 인종폭동으로 흑인 25명, 백인 9명이 사망했었다고 한다.
이무렵 A. Philip Randolph 라는 흑인 지도자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Harvard” 라고도 불리웠던 New York City College를 졸업하고 잡지를 창간한후 사회당 당원으로도 적극적이 었었는데 그는 1925년에 철도객차제조와 운영을 독점했던 Pullman 회사에 흑인노조를 만들어서 오랜 투쟁끝에 회사로부터 인정을 받아내었다. 1941년에는 군수공장들의 인종차별에 항의하여 Randolph 가 10만명을 동원해서 워싱톤에서 항의 하겠다고 하자 FDR 은 연방정부와 국방산업 기업에서 일체의 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Fair Employment Practices Committee 를 창설하여 감독하도록 하였다.
<
조태환/ LI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