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의 ‘이방인’ 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은 10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이방인을 몰라서 다시 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정독을 하고 싶어서 였다. 물론 여기서 그때의 독후감을 쓰거나 평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제목은 좀 폼나긴 하지만…)
사실 ‘이방인’ 은 경쟁의 시대를 살아 온 우리에게는 너무도 먼 이야기… 솔직히 감동을 느끼기에는 우리는 너무도 다른 시대의 삶을 살었었다. 내가 성장할 때만해도 가장 눈치 빠른 놈들, 설치류(쥐)의 생존법을 터특하는 놈들이 영웅이었다. 대립과 반목보다는… 어차피 (우리 세대에선)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자체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적당히 타협하고 경쟁하고 유행에 편승하면서 최소한 뒤쳐지지 않으면서 궁둥이 무겁게 행동하는 아이들… 그러므로 실존이란 보다 포괄적인, 치열한 생존경쟁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간혹 ‘이방인’ 을 모방하여 부조리한 행동을 하는 놈들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탐정소설… 전자오락에 심취한다면 몰라도… 그런 실속없는 장난들은 폼나게 살아가야 할… 새 시대의 새 청년에게 어울리지 않는 패잔병의 전리품같은 것이었다.
사실 운명이란 반항의 대상이 아니라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개로 태어났으면 개로 태어난대로… 주인의 바지가랑이나 핥으면서 한평생 눈치보며 살다 가면 그만인 세상(?)이었다. ‘부조리’ 란 단어도, (좀더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아무튼 공감하기에는 좀 헷갈리는 이야기였고, ‘시시프의 부조리 신화’ 는 ‘포레스트 검프’ 같은 이야기에서 조금 희극적으로 박살나기도 하는데, 아무튼 개떡같은 인생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앞만보고 달리면 길이 뚫린다는 뭐 그런 아리까리한 이야기?? ….
즉 부조리란 인식 위에 서는 그런 절대 행위라는 부조리(?)… 아무튼 영화 ‘포레스트 검프’ 에서 주인공 톰 행크스(포레스트)는 날 때 부터 저능아(아이큐 75)였고 할 줄 아는 것이 달리기 밖에 없었다.
그나마 허약체질로서 걷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포레스트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게 되는데 그의 단순무식은 월남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데 일조한다.
이윽고 큰 돈을 벌게 된 포레스트는 고향에 돌아와 자선사업을 하며 여생을 보내게 되지만 첫 사랑 제니에 대한 청혼이 거절당하자 3년 2개월 동안 달리기를 멈추지 않으며 수많은 추종자를 모으게 된다.
달리고 또 달리다가 어느날 달리기를 멈춘 그가 추종자들에게 남긴 말은… ‘피곤해요. 집에 갈래요’ 였다.(1994년에 발표, 그 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 6개의 상을 휩쓸었다.)
까뮈의 ‘이방인’ 에서 뫼르소는 소위 기분나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랍인(이방인)을 쏴 죽이고 그 스스로 사형수(이방인)로 전락한다.
여기서 뫼르소의 총격행위는 한 부조리한 인간의 실존을 찾기 위한 저항행위이기도 했지만 동시대에 유행하던 신(法)을 죽이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 시대에 있어서 신은 무기력하고 희망이 없었다. (그것은 어느 시대건,) 신학이나 주석 따위가 신을 대변해 주는 줄 착각하던 시대에 있어서, 신이 죽어야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는지 모른다.
나는 신이 죽었다고 말하는 자들의 고독을 사랑하지만 그들을 칭송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우리세대는 전세대에 씹다가 버린, 그런 실존주의의 아류나 핥는 X뼉다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세대에서 부정… 한번이라도 이방인의 끼… 또 그 용기를 가져 본적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생은 결코 영화같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저능아로 태어나 앞만 보고 달린다고 인생이 쨍하고 해 뜨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낙엽이지고… 허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질 때면 가끔은 가 버린 인생… 포레스트 검프의 성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생의 무한한 두려움… 또 그 고독의 폭풍 속을 초연히 달려가는 부조리한 인간 승리… 반항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절박하다는 뜻이요, 절박하다는 것은 영혼이 있고 아직은 낭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각 시대는 그들만의 문제가 있다. 또 그 문제야 말로 역사라고 하는 수레바퀴 속에서 (인류의)삶을 진화로 이끌어가는 과정이기에, ‘이방인’은 통쾌한 문학의 전설이면서 영웅도 패자도 없는… (아직은) 우리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인생은 스스로 부조리함을 알기에 부정을 통한 긍정… 울림있는 반항으로서의, 그 찡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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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