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부에는 등급이 없다

2017-09-06 (수) 12:00:00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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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허리케인 ‘하비’는 인자하지 않은 자연의 심술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하비가 무차별적으로 투하한 물 폭탄이 휩쓸고 간 텍사스는 초토화됐으며 그 자리엔 수십만 이재민들의 절망과 한숨소리만 남았다.

하지만 자연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도 인간은 강인한 정신과 공존의 지혜로 끈질기게 생존의 역사를 이어왔다. 하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실의에 빠진 피해자들에게 전국 각지로부터 위로와 온정의 손길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유명인사들이 앞장서 피해자 돕기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도 재해나 참사가 발생했을 때 거액을 쾌척한 유명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SNS가 보편화되면서 이들의 기부가 가져다주는 파급효과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대표적인 경우가 하비 최대 피해지역인 휴스턴을 연고로 한 NFL팀 텍산스의 스타선수인 J.J. 와트이다. 와트는 10만달러를 기부하면서 소셜미디어를 통해 네티즌들의 동참을 호소했는데 5일 현재 모금액이 2,000만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당초 목표액은 20만달러였다.

기부를 논할 때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않고 행하는 익명의 기부를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기는 시선이 아직은 강하다. 그래서 연말에 불우이웃을 돕는 일에 써달라며 익명으로 행하는 큰 기부는 화제가 되곤 한다. 이름을 밝히고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면서 하는 기부에는 뭔가 사심이 있을 것이란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기부를 통해 조성된 돈이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쓰여 지는가 하는 것이지 기부의 형식이나 동기가 아니다. 인기 배우 김남길 씨가 방송에서 이런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2010년 방송제작진과 함께 인도네시아 지진피해 구호현장을 갔던 그는 구호활동에 집중하고 싶은데 카메라가 옆에서 계속 찍어대는 바람에 크게 불편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담당 PD와 말다툼까지 벌였다.

그런데 나중에 프로그램이 방송된 후 그는 깜짝 놀랐다. 성금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자원봉사자도 크게 늘어난 것이다. 그는 그 때 남몰래 선행을 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좋은 곳에 쓸 수도 있음을 깨달았으며 이후 아예 비영리 재단을 만들어 구호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또한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익명기부에서 실명기부로 돌아선 케이스다. 몇 년 전 그는 공교육 개혁을 위한 기금으로 1억달러를 익명으로 기부할 계획이었다가 “당신의 이름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오프라 윈프리의 조언에 실명기부로 마음을 바꿨다. 그는 이번에도 하비 피해자들을 위해 열심히 온정을 모으고 있다.

러스 프린스와 캐런 파일이 공저한 책 ‘자선의 7가지 얼굴’(The Seven Faces of Philanthropy)을 보면 사례분석을 통해 추린 자선의 유형들이 나온다. 가장 많은 것은 공동체형(26%, 선행은 합당한 일)과 신앙형(21%, 선행은 신의 뜻), 그리고 투자형(15%, 선행은 좋은 비즈니스)이다.

이밖에도 “재미가 있어서” “옳은 일을 한다는 느낌 때문에” “가문의 전통이기 때문에” 등 다양한 동기들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다른 동기들일 뿐,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고상하고 우월한지 순위를 정할 이유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덕이 순환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은 역경에 처했을 때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뿐 아니라, 삶이 윤택할 때도 자기가 도움을 줄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식량과 생명이 되고 또 용기와 희망이 된다면 익명 혹은 실명 여부를 떠나, 액수의 적고 많음과 관계없이 기부는 똑같이 소중한 것이며 ‘받는 사람’ ‘주는 사람’ 모두를 도와주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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