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음악에 대해 쓰다보면 가끔 ‘어떻게 하면 고전음악을 잘 알고, 쉽게 가까이 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많이 듣곤 한다. 이때 늘 느끼는 것은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스스로도 그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얼마 전에 일어난 일식 같은 것이라고나할까. 태양과 달, 지구가 일직선 상에 놓인다는 것은 보기 힘든 현상이지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일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즉 마음과 대상… 타이밍이 일직선 상에 놓일 때, 운명은 (우리에게 )보통의 경우에는 볼 수 없는 무언가의 새로운 기적을 연출하는 법인 것 같다. 청소년 시절, 한동안 신병으로 휴학기를 보낸 적이 있었다.
긴 시간의 공백동안 할닐없이 빈둥빈둥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나름 학과를 보충한다거나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통원치료를 하면서 집과 병원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자연스럽게 세계와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즉 멍때리는 시간이 많아지고 생체의 리듬이라고나할까, 사람의 몸 속에 묘한 전류같은 것이 흐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본인이 자각하든 못하든,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들어오던 그러한 소리에 대한 자각이었다.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삶에 매몰되어 살아 갈 때는 들을 수 없었던 많은 소리들이 또다른 우주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각성이라는 것은 눈을 뜨고 무언가를 깨닫는 것만이 아니라 눈을 감고 내부에서 들려오는 어떤 내면의 소리를 발견하는 것도 하나의 각성이라는 것도 알았다.
베토벤의 교향곡… 모차르트의 시냇물 흐르는 소리, 바하의 평하로움… 낭만파 교향악들의 찬란한 향연… 그것들은 마치 한 편의 우주쇼처럼 영혼과 대지 위를 감돌고 있었는데, 세상 밖의 또 다른 세상, 그저 문을 걸어 잠그고, 어둠이 주는 밝음을 찾아 세상 끝으로 걸어가는 통로… 그 피안이 주는 아스라함이었다고나할까.
수많은 음악과의 만남 중에서 말러는 어쩌면 이러한 청소년 시기의 의식을 가장 많이 반영하고 있는 작곡가(음악)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머리는 일년에 한번쯤 깎을까 말까, 형이 물려 준 철지난 가다마이(양복) 한 벌 걸치고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채 방황하던 그 시절… 몽유병 환자 처럼 영혼없는 육체… 혹은 육체없는 영혼처럼 떠돌던 버거운 한 때였지만, 그러한 젊음의 한 때 마저 없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아니었을까.
요즘은 말러가 유행이다. 좋은 현상이라고 해야할지 나쁜 현상이라고해야할지, 좀 애매하지만 말러의 위험성은 세드 무드(sad mood)다. 요즘이야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지만 3, 40년 전만해도 말러의 존재는 낯설었었다. 특히 한국의 방송이나 음악회 등에서 말러를 듣기는 매우 힘들었는데 그것은 말러가 그만큼 알려지도 않았지만 그의 교향곡들이 대부분 1시간 반 대 이상 긴 교향곡들이어서 대중들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작품으로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말러 매니아들이 꽤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아무튼 요즘은 오히려 말러가 왜 그렇게 유명해야하나 의문이 갈 만큼 어딜가나 말러판이다. 왜 말러일까? 그것은 그의 위험한 세드 무드때문일 것이다.
말랑말랑, 멜랑콜릭한 것은 힘없고 무기력하지만 사실 인간은 부정적일 때 가장 자기적인 것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이 전부인 자, 혹은 전부인 자와의 대결이다. 일이든 예술이든 무(務)… 즉 전쟁하듯 일하는 자가 가장 무서운 법이다.
말러를 말러답게 만든 것은 반항이었는데 떠돌이 유태 음악가로서… 살기 위해 (오페라, 심포니, 작곡… ) 닥치는 대로 일했고 유전으로 인한 딸의 사망, 아내 알마의 배신… 유랑자 말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술 밖에 없었다.
어쩌면 재능이라기 보다는 유전 속에 뿌리박힌 어떤 운명(의식)… 절실하고도 개인적이며 자신과의 피나는 싸움이었는지 모르지만 왕따 음악으로서, 요즘처럼 처절한 상처의 공감을 안겨주는 작곡가도 드물다 할 것이다.
요즘이야 (말러의) 9개 교향곡을 모르면 간첩이 되겠지만 때로는 거칠고… 짙은 과장으로 점철된 그의 음악들이 우리를 주눅들게 하면서, 그럼에도 말러에게 돌아가게하는 것은, 생의 한 가운데를 걸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이랄까… 피안의 아스라한… 상처 속에서 살아남아야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의 가벼움… 버거움때문은 아닐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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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