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트럼프 행정부가 끈질기게 요구해 온 금융규제 완화에 대해 그럴 생각이 없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옐런은 지난 25일 와이오밍 주 잭슨홀에서 열린 심포지엄 연설을 통해 2010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도입한 금융규제 강화를 내용으로 한 ‘도드-프랭크 법’을 옹호하면서, “2008년 금융위기가 초래한 대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트럼프 요구에 반기를 든 이번 발언으로 옐런의 연임 가능성은 낮아졌지만 할 말을 했다는 게 중론이다.
옐런의 발언은 발생한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경제적 대참사의 기억을 벌써 잊은 듯 규제완화를 들고 나온 정치권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다. 2008년 전 세계를 고통과 공포에 빠뜨린 글로벌 금융위기는 정책과 규제실패가 부른 재앙이었다. 참사가 휩쓸고 지나간 후 위기에 대한 원인분석과 자성이 뒤따랐지만 그것은 잠시 뿐, 또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려는 분위기가 고개를 들고 있다.
커다란 실패와 그에 따른 쓰라린 경험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옅어지고 잊혀진다. 그러면서 과거의 나쁜 습관으로 서서히 되돌아가게 된다. 흡연으로 심장병 수술을 받았던 환자들의 대다수가 2년 후면 다시 담배를 손에 쥔다는 추적조사는 나쁜 습관일수록 끊기가 힘들고, 그 결과 실패가 되풀이 된다는 걸 보여준다.
옐런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실패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금융위기가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실패는 별로 드러내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치스런 일로 인식돼 왔기 때문이다. 특히 성공 이데올로기와 살벌한 경쟁이 일상의 규범이 된 신자유주의 아래서 실패는 지우기 힘든 낙인이 되곤 했다.
그나마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실패를 점차 가치 있는 경험으로 받아들이려는 추세가 조금씩 활발해지고 있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이를 자산으로 삼자는 움직임이다. 이른바 ‘실패학’이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가 등장하고, 실패 사례의 공유를 통해 성공의 지혜를 찾아내자는 취지의 콘퍼런스인 실리콘밸리의 ‘페일콘’(Failcon)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경험으로부터 배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안다. 실패의 인정과 반성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험으로부터 배우기만 해도 충분히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사회를 뒤흔든 살충제 계란 파동과 관련, 일단 상황을 수습한 후 사태의 전 과정을 소상히 기록한 ‘실패백서’를 발간하라고 지시한 것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문 대통령은 이번 사태의 혼란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정지지도가 70%를 넘는 상황에서 실패를 입에 올린 것은 이례적이다.
그런 가운데 박근혜 정권이 지난 연말 자화자찬으로 가득한 정책백서를 발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차례 시끄러웠다. 백서는 위안부 할머니들 가슴에 대못을 박은 일본과의 합의에 대해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자평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반성도 없이 “재해 예방의 질서를 확립했다”고 평가했다. 뻔뻔하다는 비난이 쏟아진 건 당연하다.
이 백서는 왜 박근혜 정권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패를 감추고 덮기에만 급급했지, 교훈을 얻어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그 어떤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실패들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것, 이것이 박근혜 정권의 가장 큰 실패였다. 이런 실패가 문 대통령에게는 ‘반면교사’가 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실패의 가치는 기록에 있는 게 아니다. 백서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나아지는 것 하나 없이 실패백서만 쌓여간다면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통’이란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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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