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솜털처럼 가볍게

2017-08-22 (화) 임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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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존재하는가

시작과 끝은 어디에 있으며 나는 왜 생겨났는가


세상에는 비밀들이 너무 많아서

십대의 많은 시간을 미친 듯이 책을 읽었다

억울하지만 슬픈 유언장을 쓰고 다시 쓰기도 하였지만

젊다고 믿었던 시간들은 생각보다 너무나 짧았다

나는 억울하게 죽지도 않았고

사랑 때문에 미치지도 않았으며

아 나는 그 이후로 삼십 년이나 더 살았다


세상을 무겁게 살았지만 삶은 그만큼 진지하지 못했고

고뇌와 갈망으로 많은 밤을 새웠어도

내 영혼은 사려 깊지 못했고

세상에다 이름자를 흔쾌히 내놓지도 못했다

내일 밤에

스티븐 호킹의 빅크런치가 온다면

우주의 종말이 온다면

그래서 그냥 가볍게 살기로 한다

바짓단이나 옆구리에 붙은 실밥처럼

우주를 엮다가 우연히 걸려든

솜털처럼 가벼운

사소한 생이었다고

임희숙(시대문학 등단) ‘솜털처럼 가볍게’ 전문

미친 듯이 책을 읽고 슬픈 유언장을 쓰고 뜨겁게 사랑하던 시절이 가고 그러고도 수십 년이 더 흐른 뒤, 시인은 지나간 날을 뒤돌아본다. 그 많던 고뇌와 갈망의 밤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시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그저, 허무일 뿐이라니 삶이란 너무나 비경제적인 투자인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남기는 게 있다. 겸허라는 아주 깊고도 사소한 깨달음이다.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 맛보지 못할 그 허무, 그 쓸쓸함, 그 낮음. 우주의 한 구석에서 솜털처럼 가볍게 흔들리는 그것은 생이라는 빛나는 보석이다. 임혜신<시인>

<임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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