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한껏 높아졌던 ‘협치’의 기대감이 허물어지고 있다. 장관 후보자 검증을 둘러싸고 조성됐던 여야 대립은 국민의당 제보조작 파문으로 갈등이 증폭되면서 돌아오기 힘든 다리를 건너는 모양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파격적인 행보로 국민들에게 새 정치에 대한 희망을 안겨줬지만 정치권이 사사건건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런 열망은 급속히 식어가고 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자조적 탄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책임의 소재가 누구에 있든 정치권으로서는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서로가 상대에게 손가락질하기에만 급급하다. 도무지 국민들에 대한 책임감이나 국가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 당장 정당으로서 살아남고 정치인으로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만이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여야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진정 국민들을 먼저 생각하는 협치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작금의 상황은 한국정치에서 소속 정당이라는 물리적 울타리와, 이념과 지역이라는 정서적 울타리를 허물고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절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한국 맥주 맛에 대한 촌평으로 화제를 모았던 영국 이코노미스트 전 한국 특파원 다니엘 매튜는 2년 전 펴냈던 한국정치에 관한 책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에서 “한국의 정당들은 철학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부족주의’(Tribal Mentality)가 자리 잡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요즘의 한국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제대로 맥을 짚어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부족주의는 자신의 부족 생존이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한다는 절대적 믿음을 말한다. 조금 뒤집어 표현한다면 내 부족이 아니면 어찌돼든 상관없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부족주의가 지배하는 정치에서 국민과 대의가 들어설 자리는 별로 없다.
부족주의는 원시시대부터 생존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부족이 똘똘 뭉치지 않으면 외부의 위협에 대적하기 힘들었다. 그러면서 이런 부족 멘탈리티는 우리 뇌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자동설정’된 것이다. 그 결과 모든 것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데 너무 익숙하게 됐다.
전쟁과 종교적 싸움 등 지금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갈등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런 부족주의가 초래한 비극이다. 지구촌뿐 아니라 각 나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툼과 대립도 대부분 부족주의의 산물이다. 그 가운데 대한민국의 고질병이 돼 버린 지역감정은 바람직하지 못한 부족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부족주의가 과거에는 필수적인 생존전략이었을지 몰라도 21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의 가치다. 과거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상식’에 반하는 것들로 버려진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노예제 같은 게 대표적이다. 부족주의 또한 지구촌 시대 운운하는 21세기에는 버려야 할 낡은 가치이다.
부족 멘탈리티는 거의 본능적인 것이기에 없애거나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부족주의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접촉가설’을 제안한다. 일단 서로 만나서 소통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올포트의 제안을 따른다면 문 대통령은 벽에 부딪히는 한이 있더라도 야당과의 대화노력을 결코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다니엘 튜더는 부족주의가 판치는 기성정치의 대안으로 풀뿌리 정치가 점차 힘을 얻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는 풀뿌리의 힘을 지난겨울 촛불시위를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정치인들이 부족주의에 갇힌 채 구태를 반복한다면 국민들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표를 통한 심판이 됐든 다양한 방식을 통한 의사표시가 됐든 말이다. 시대에 뒤처진 인간들에게만 맡겨 놓고 있기에는 정치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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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