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필을 깎는 동안’

2017-07-04 (화) 12:00:00 이 안 (196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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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깎는 동안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아내도 새끼도 없이


대구 뉘 집인지 모를 데를 기웃거린다

아주 오래 깃들여 산 듯이

마당부터 마루부터 부엌부터가

반질반질 눈에 익다

붉고 따뜻한 아궁이 불이 자서

부뚜막이 알맞게 식고,

불 켜진 방에는 인기척이 없다


그러나 무슨 심산가

정작 집에 닿아서는 집을 등지고

세상의 불빛 아득히 건너다본다

먼 어둠 너머

나를 등지고 내게로 돌아오는

연필을 깎는 동안

부뚜막이 알맞게 식은 부엌을 가진 집, 반질 반질 눈에 익은 인기척 없는 집은 누구의 집일까. 그 집은 아주 오래 전 우리가 등지고 떠난 과거의 집이며,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들 모두의 영혼 속에 지어 진 ‘인간의 집’이다. 연필을 깎는 아무 것도 아닌 시간에 찾아온 이 쓸쓸한 풍경이 영혼의 먼 본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본향을 향한 죄의식과 사랑과 그리움 속으로. 그리고 거기 짧고 깊은 외로움 속에서 생은 고요히 피어난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문득 피어나듯이. 그리고 그렇게 사라지듯이.임혜신<시인>

<이 안 (196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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