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58)미국의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2017-05-26 (금)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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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58)미국의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D. 대공황 중의 미국민들의 삶

Hoover 대통령은 열등한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지만 어떤 미국 역사가들은 그가 어느 대통령 못지않게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평가받고 있다고 얘기한다.

Hoover 는 그들 밑에서 오랫동안 상무장관으로 일해왔던 Harding 과 Coolidge 두 대통령의 실정으로 대공황이 불가피하게된 경제를 물려받아 임기내내 대공황을 벗어나 보려고 진력을 다 하였지만 대공황은 더욱 심각해져 가고만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가 대공황이 시작된 연유에 전혀 책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성공을 위해서는 기업들의 경제활동에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 소극적인 작은정부가 좋다는 그의 정치철학 때문에 그의 정책은 “한발 늦게, 너무 적게” 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는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언변이 없었고 Theodore Roosevelt 대통령 같은 정치적 융통성이 없었다. 착실한 Engineer 출신답게 사태를 관찰하고 해결책을 작성한 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해결책을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 하였다.

과잉생산과 농산물 가격하락으로 계속 어려움을 겪고 있던 농업부문은 대공황이 닥쳐 오면서 더욱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는데 Hoover 는 적시에 효과적인 구제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는 어려운 사정에 빠진 사람들을 정부가 직접 도와주는 정책을 반대 하여왔다.

한번 직접구제를 경험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정부의 구호에 의존하는 버릇이 생긴다고 생각 하였는데 근래의 미국 공화당이 정부가 빈민들을 도와주는 모든 정부정책을 다 싸잡아 “welfare” 라고 비난하면서 반대하는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1929년 봄에 농산물 유통과 가격유지를 촉진하기 위해서 Agricultural Marketing 법이 제정되어 5억불의 예산을 가진 Federal Farm Board 가 설립되었다. 이 Board 는 농산물 판매 촉진을 위하여 농업협동조합들에게 대부를 해주고 농산물 가격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에 따라 농산물을 구매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Board 는 농산물 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으며 가격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밀과 면화를 구입하였지만 가격하락을 막을 수가 없었다.

1931년 말에 이르러서 밀은 bushel 당 1불에서 61전이 되어 있었고 면화는 pound 당 16전에서 6전으로 내려왔다. 밀과 면화의 구매에서만 정부는 1억8천5백만불의 적자를 내었다. 설상가상으로 1930년에는 근년에 없었던 막심한 한발이 있어서 Virginia 주에서 Oklahoma 주 사이의 18개 주의 50만여의 농가에서는 농작물들이 말라 시들어갔고 축우들이 갈증으로 죽어 갔다.

Hoover 는 국회가 가축들의 사료를 위하여 4천5백만불의 자금을 농민들에게 지불하는데는 동의하였으나 굶어가는 농민들을 위해서 2천5백만불을 지불하는 것에는 반대 하였다가 2천만불을 대부하여 주는 것에는 동의하였다.

1932년 봄에 실직중인 제대군인들 수천명이 “Bonus Army” 라는 비공식적인 단체를 구성하였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재대군인들로서 정부로 부터 1945년에 만기가 되는 Bonus 증권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대공황으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Bonus 증권의 만기액면가를 당장에 지불해 달라고 Washington 에 집결한 후 행진하며 다니면서 요구하였다.


Hotel에 묵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이었던지라 정부소유의 빈 건물들에서 잠을 자거나 정부 소유의 공한지에 camp 를 차려놓고 bonus 가 나올 때까지 버티겠다고 주장 하였다. Hoover 대통령은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그들을 철수 시킬 것을 명령하였고 Dwight D. Eisenhower 장군과 George Patton 장군들도 지휘장교들로써 참가했던 Tank 부대가 동원되어 Bonus Army 를 강제 철수시켰다.

이 과정에서 대포까지 발포되어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많은 국민들이 “세계 최강의 미군들이 tank 까지 동원해서 비무장 민간인들을 사상하였다. 과연 이곳이 미국이냐?” 라고 항의 하였다고 한다.

실직으로 절망적인 형편에 빠진 사람들은 곳곳에서 기아의 행진을 했다. Oklahoma 의 어떤 도시에서는 300여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식품가게에 쳐들어가 식품을 강탈하여 갔다. Iowa주와 Nebraska 주에서는 대부금을 갚지 못하여 근저당으로 잡혀있던 농토들을 차압하기 위하여 집달리들이 찾아오자 농민들은 fork 처럼 생긴 삽과 기타의 농기구들을 휘둘러대며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1930년에서 1934년 사이에 1백만 농가들이 농토를 압류 당했다.

“은행들을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 화폐를 더 많이 인쇄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는등 종말론적인 불평들이 쏟아져 나왔다. 1930년 12월에 Hoover 는 고용증대를 위하여서 대규모 공공공사를 시작하였다. 그의 임기가 끝날때까지 Hoover 는 도로, 건물, 기타 대기업, 공공건설에 20억불을 쏟아 넣었다.

금융자금 고갈로 인한 대기업, 은행, 보험회사등의 파산으로 실업자가 증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Hoover 는 1932년 봄에 “재건금융회사” (Reconstruction Finance Company: RFC) 의 창립이 입법되도록 하였다. RFC는 20억불의 자금을 가지고 은행, 보험회사, 철도회사, 농업협동 조합 등이 비용을 절감하도록 도와주고 새 회사들이 더 쉽게 창립될 수 있도록 하는 임무를 가졌다.

또 Hoover 의 요청에 따라 국회는 Federal Home Loan Bank 를 창립하여 주택융자 미지불로 주택차압을 당하게 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Hoover 의 총력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경제는 대공황으로 계속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그가 대통령에 취임했고 대공황도 시작되었던 1929년의 1년 전인 1928년부터 그의 임기 마지막 해이었던 1932년까지의 아래에 적은 통계숫자를 보면 대공황의 심각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58)미국의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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