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cilia, 시칠리아>
“시칠리아가 영화의 주요 무대가 된 이유는 따로 세트를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스카피디 세르지오 시칠리아 관광국장의 말이다.
시간의 흐름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촌스럽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모두 늘씬하고 남다른 패션 감각을 지니고 있을 것 같지만 시칠리아에선‘패션 테러리스트’도 크게 주눅들 필요가 없다. 동행한 패션담당 기자는‘한껏 멋을 부린 사람도 왠지 2% 부족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시네마 천국’, ‘일 포스티노’의 주인공처럼 한편으로는 꾸미지 않은 수수함이 시칠리아의 매력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주목 받은 영화의 자취를 따라 시칠리아 북부를 둘러보았다.
‘시네마 천국’ 보다 관광휴양 천국, 체팔루(Cefalu)
아쉽게도 토토는 만나지 못했다. 대신 지인을 통해 그의 근황은 들을 수 있었다. ‘시네마천국’은 영사기사 안토니오와 꼬마 토토의 우정을 따뜻하게 그린 영화다. 영화의 주무대인 팔라조 아드리아노(Palazzo Adriano)는 팔레르모에서 약 2시간 떨어진 산골마을이다. 어린 토토 역할을 맡은 살바토레 카시오(34)는 이곳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시네마 천국이 그의 첫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였다.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주 이탈리아 한국대사관 시칠리아 명예대사인 안토니오 디 프레스코, 우연히도 영화의 주인공과 동명이다.
토토가 사는 마을은 가지 못했지만 시칠리아 중북부의 휴양도시 체팔루(Cefalu)에서 잠시나마 시네마 천국의 감성에 젖을 수 있었다. 체팔루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햇살은 따가웠고, 바다에서는 마른 바람이 불었다. 하얀 모래해변으로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파도가 쉼 없이 밀려들고, 바다와 맞닿은 해안마을은 신기루처럼 붉게 물들었다.
비릿한 내음도 끈적이는 습기도 없었다. 황사에 미세먼지까지 익숙해져 버린 폐부에 지중해의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티끌 하나 없을 듯한 투명한 대기에 원근감마저 사라져 선명한 풍경은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들었다.
도심 끝자락 이 방파제와 해변이 바로 시네마 천국에서 영사기를 새로 들인 기념으로 야외상영을 한 곳이다. 울타리를 두른 임시 상영관에 들어오지 못한 시민들이 쪽배를 타고 영화를 관람하다 폭우에 피신하는 모습, 세찬 빗줄기 속에서 토토가 여자친구로부터 진한 키스 선물을 받는 장면이 그려진 장소다.
지금이야 방파제에 불과하지만 실제는 오래된 성곽의 연장선이다. 체팔루는 거대한 바위 언덕 아래 만들어진 요새 도시다. 해변을 따라 지은 건물이 자연스럽게 성곽을 형성하고, 빈틈은 3m 두께의 바위로 벽을 쌓았다. 그리스인들이 이주한 기원전 5세기부터 쌓은 성이 해안선을 따라 곳곳에 숨어 있다.
도심 중앙에 자리잡은 성당은 팔레르모의 ‘아랍-노르만’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리스인과 유대인, 아랍인과 노르만족의 흔적이 혼재해 동서문화의 용광로인 시칠리아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성당을 중심으로 격자를 형성한 골목은 한국 여행객들이 특히 좋아할 만한 분위기다. 차 한대 겨우 지나갈 좁은 골목 양쪽으로 기념품 가게와 카페가 빼곡하다. 오래된 건물마다 대략적인 건축시기를 표시한 안내판이 있어 도시의 역사를 알린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고풍스럽고 셔터만 누르면 감성 사진이다. 내리막길 끝자락에는 어김없이 푸른 바다가 걸린다. 큰 수건을 깔고 해변에서 볕을 쬐거나 수영을 하는 여행객의 모습에서 지중해의 자유와 여유가 넘친다.
갈수록 반전매력, ‘일 포스티노’ 촬영지, 살리나(Salina)
갈까 말까 망설였다. 아무리 작은 섬이라지만 한나절 일정은 너무 짧았다. 수박겉핥기 수준으로 무얼 보고 전달할 수 있을까.
‘일 포스티노’는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국민 시인이고, 소설 속의 섬도 태평양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영화는 시칠리아 북부 에올리에 제도의 작은 섬 살리나로 무대를 옮겼고, 등장 인물도 이탈리아 사람들로 대치했다. 얼마나 그럴듯했으면 주인공을 현지 캐스팅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넘쳐날 정도다. 실제 마리오를 연기한 마시모 트로이시는 나폴리 태생으로 각본까지 맡았고, 영화를 완성한 1994년 심장마비로 숨졌다.
살리나에 머무른 시간은 단 3시간, 마음이 바빴다. 일 포스티노 촬영지 폴라라(Pollara)는 쾌속선 선착장에서 섬 반대편이다. 거리는 13km에 불과하지만 900m급 화산을 2개나 에둘러야 하는 곳으로 차로 30분은 걸린다. 대신 바다로 가파르게 흘러내린 산세는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선착장을 출발한 차는 바다가 보이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넘어 말파라는 작은 마을을 통과한다. 구릉에 형성된 농지 끝자락 바다 절벽에 전망 좋은 호텔들도 제법 있다. 폴라라까지 가려면 고갯길을 또 하나 넘어야 한다. 구불구불 이어진 고갯마루에서 가이드가 차를 세우고 언덕 끝으로 안내한다. 순간 눈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에 감탄사가 폭발한다. 반전이다. 항아리처럼 둥그스름하게 움푹 패인 바닥에 폴라라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웅장하고 아늑하다. 이 풍경을 영화에서는 왜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을까. 어촌마을의 자잘한 일상과 정서에 집중하기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으리라 추측해본다.
마을은 커다란 화산 구덩이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절반은 바다에 잘려나간 모양새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술집과 네루다 거주지 등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 펼쳐진다.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전하고 싶었던 파도와 바람과 별과 꽃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한나절이 아니라 한 달쯤 머무른다면 이 모든 것들이 생생한 시어로 되살아날 듯하다.
살리나에 가려면 시칠리아 동북부 밀라조에서 쾌속선을 타고 1시간 가량을 달려 리파리 섬을 경유해야 한다. 리파리는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에올리에 제도의 7개 섬 중 가장 큰 섬이다. 이웃한 불카노 섬의 화산 흔적을 볼 수 있고, 맑은 날엔 지금도 연기를 내뿜는 스트롬볼리 섬도 보인다. 고고학박물관으로 개조한 리파리 성을 둘러보면 에올리안 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화산섬에서만 볼 있는 희귀 암석과, 고대 그리스 유물 등을 전시해 섬의 지질과 역사를 동시에 보여준다.
영화와 현실의 간극, ‘대부’ 촬영지, 팔레르모(Palermo)
“이건 아니죠, 악몽입니다(Oh no, it’s nightmare)”
순간 실수를 직감했다.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의 활기찬 거리 풍경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고, 자랑 삼아 현지가이드에게 보여줬다. 고개를 가로젓는 의외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해시태그로 영화 ‘대부(The Godfather)’를 언급한 게 문제였다. 시칠리아로 떠나기 전 50세 언저리의 지인들은 한결같이 ‘마피아 조심하라’거나 ‘알 파치노에게 안부 전해달라’는 식의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현지인에게 ‘대부’는 추억의 갱단 영화도 마초적 향수도 아닌 현재진행형 악몽이었다. 그만큼 온도 차가 컸다.
팔레르모 공항의 정식 명칭은 ‘팔코네와 보르셀리노 팔레르모 공항(Aeroporto di Palermo Falcone e Borsellino)’이다. 마피아와의 전쟁을 주도한 두 판사의 이름을 붙인 이유는 분명하다. 팔코네 판사는 1980년대 중반 일명 ‘맥시 재판’으로 시칠리아의 마피아 342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며 마피아 척결에 앞장섰지만, 1992년 공항 인근 고속도로에서 차량 폭발로 아내, 경호원 3명과 함께 즉사했다. 이 끔찍한 장면을 TV로 지켜 본 시칠리아인들에게 영화는 결코 아름답게 미화할 수 없는 악몽임이 분명했다. 팔레르모 시청 벽면에는 아직도 반(反)마피아 현수막이 걸려 있다.
시칠리아 당국이 정작 자랑하고 싶은 것은 마피아 영화가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51개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그 중 시칠리아가 8개를 보유하고 있다. 팔레르모에서는 아랍과 노르만 양식이 결합된 건축물 ‘아라보-노르마나 유적’이 이름을 올렸다.
팔레르모 도심에서 멀지 않은 해변엔 5월 초인데도 해수욕을 즐기는 시민들로 붐비고 있었다. 바닥까지 투명한 에메랄드 바다가 눈부시다. 이곳에서 마피아의 음산한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
<시칠리아=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