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불평등한 사랑

2017-05-20 (토) 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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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사랑이 아닐까 싶은 행동을, 놀랍게도 사람이 아닌 동물 세계에서도 발견한다. 동물의 생태계를 다룬 프로그램에서 흔히 목격하듯, 생존을 위한 싸움이나 번식에 대한 욕구는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이다.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도덕적으로 치장하여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 동물적인 욕구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새나 동물이 자기 새끼에게 베푸는 행위를 단순한 번식 본능으로 분류하기에는 왠지 그 너머의, 일종의 모성애나 부성애가 느껴지는 경우를 본다.

다큐멘터리 펭귄 영화를 보았다. 수천 마리의 암컷들이 드센 바람을 피하려고 남극의 얼음 위에 구름처럼 모여 있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먹이를 사냥하러 바다로 나갔던 수컷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자기 짝을 구별할까. 수컷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을 길게 빼고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짝을 찾아다녔고 암컷들 역시 저마다 목청껏 소리를 높였다.

집단을 이룬 펭귄은 빽빽하게 모여 있어 마치 흐드러지게 핀 배꽃을 멀리서 바라볼 때처럼 개개의 모습은 구별하기 어렵고 하얗고 검은 점의 군집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수컷들이 제 짝을 찾아내어, 알을 품은 암컷 입에 먹이를 넣어주는 극적인 장면이 연속하여 카메라에 잡혔다. 수천 마리 펭귄 중에서 어떻게 자기 짝을 찾는지, 놀라웠다. 무엇의 힘일까 생각하는데 불현듯, 수백 명 학생 사이에서 마치 무언가에 끌린 듯 아들을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대학 졸업식 날, 식장은 온통 가운을 입은 졸업생으로 붐볐고 멀리 2층에 앉아서 보니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아 보였다고 했다. 그 번잡한 움직임 속에서 그녀는 자기 아들을 어떻게 찾을지 막막했다. 옷 색깔이라도 다르면 모를까 똑같은 검정 가운을 입고 있으니 남녀 구분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멀찌감치 떨어진 아래층 벽 쪽에서 뭔지 모르게 시선을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려다보니 자기 아들이더라고.

우연일 수 있고, 틀림없이 우연이리라. 그럼에도 일종의 기(氣)의 영향력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형용하기 어려운 기운이 아들과 그녀 사이에 형성되었던 것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어느 정도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 몰라도 그녀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을 경험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우리가 4강에 오른 것이 온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뿜어낸 기의 힘도 일부분 작용한 게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를 통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원하면 소망이 실현되도록 온 우주가 도와준다”라고 전한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우리 속담 ‘지붕 위 호박도 사흘만 노려보면 떨어진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기(氣)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말을 들을 때면, 간절함과 열정이 한 곳에 응집되면 없던 힘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동물은 ‘동물만의 언어’로 식별하는 능력, 그러니까 울음소리나 냄새로 혹은 몸동작으로 분별하는 그들만의 질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천수만 마리 펭귄 사이에서, 제 새끼를 살리겠다는 강렬한 발원(發願)에 의한 끌림이라면 그것을 사랑의 힘이라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똑같은 동물로서의 본능을, 인간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에둘러 표현하여 결혼이라 부르는 제도권 아래 두었을 뿐이 아닐는지.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나는 그가 분류한 사랑 중에서 가장 ‘불평등’하고 이타적인 사랑에 주목했다. 그것은 형제애나 우애, 또는 남녀 간의 사랑처럼 서로 주고받는 상대적인 평등한 사랑이 아니라, 모성애처럼 무조건적으로 주는 사랑을 말한다. 그런 사랑이라면 다른 어떤 관계에서보다 본능적 끌림이나 기(氣)가 강하게 작용하리라는 추론이 어렵지 않다.

‘불평등’한 사랑이 아니더라도 외모나 환경처럼 어떤 한 사람을 둘러싼 것들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있다면 성숙한 사랑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인간이든 동물이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조건 없는 이타적인 사랑의 힘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이 있는 5월과 6월. ‘불평등’한 사랑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중요한 것은, 성숙한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일 터. 사랑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관심과 사소한 것에도 귀 기울이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하리라. 어떤 사랑이든 사랑의 시작은 결국, 관심이 아닐까.

<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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