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영국이 예상을 깨고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고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반세계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보였다.
세계화의 한 축인 자유무역은 부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주범으로 지탄받았고 다른 한 축인 자유로운 인간의 이동은 회교 테러리스트의 잠입을 손쉽게 한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됐다.
지난 달 열린 프랑스 대선 1차 선거를 앞두고 전통적인 프랑스의 양대 정당인 사회당과 공화당 후보가 맥을 못 추고 극좌파의 장-뤽 멜랑숑과 극우파의 마린 르펜이 각각 20%에 가까운 지지를 받으며 기세를 올리자 반세계화의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예선 직전 파리에서 테러가 터지자 반세계화의 기수 트럼프는 “파리에 또 테러가 터졌다. 프랑스 국민들은 더 이상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대선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트윗을 날렸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트럼프는 AP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번 사건은 국경 보호와 프랑스 국내 문제에 가장 강력한 입장을 보여 온 르펜에 유리할 것”이란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1차 선거에서 중도 개혁파 에마뉘엘 마크롱과 르펜이 1, 2위로 결선에 오르자 트럼프의 예측은 맞아드는 듯 했다, 그러나 7일 실시된 결선에서 마크롱은 66대 34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르펜을 꺾고 39세의 나이에 프랑스 지도자로 등극했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도 지난 번 미국 대선 때와 같이 러시아 소행으로 보이는 해킹이 자행되기는 했으나 선거 결과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반세계화와 극우 국수주의 대세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에 앞서 치러진 작년 12월 오스트리아 대선에서 국민들은 극우 민족주의자 노르베르트 호퍼를 버렸고 지난 3월 열린 네덜란드 총선에서는 역시 극우파인 게르트 빌더스가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그러나 반세계화 국수주의의 퇴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트럼프 자신이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전 세계와 무역전쟁을 불사할 것 같이 굴던 그는 중국에 45%의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공약과 중국을 취임 첫날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는 공약을 버리더니 북미 자유무역 협정(NAFTA) 폐기를 포기하고 멕시코 장벽 건설 예산을 취임 후 첫 예산에서 빼는 것에 동의했다.
이와 함께 트럼프 당선과 함께 폭락세를 보였던 멕시코 페소화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고 미국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가끔 한미 자유 무역협정을 재협상 하겠다는 소리가 백악관 근처에서 흘러나오기는 하지만 한국 증시도 연일 폭등하며 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원화 환율도 한 때 달러 당 1,200대를 넘었지만 이제는 1,130선대로 떨어진 후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어느 곳도 무역전쟁이 일어나 세계가 불황으로 빠져들 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트럼프의 협박은 말뿐이라는 것을 투자가들이 알아버린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이 의회에 한 석도 자기 정당이 없는 엘리트 투자은행가 출신 젊은 정치 초년생을 국가 지도자로 선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프랑스가 처해있는 상황이 위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프랑스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아직도 10%가 넘는 실업률에 시달리고 있으며 청년 실업률은 그 2배가 넘는다. 500만에 달하는 회교도 이민자들은 프랑스 사회에 동화되지 못한 채 빈곤과 차별에 시달리고 있고 여기서 자란 갈 곳 없는 청년들은 극렬 회교 테러 단체의 좋은 포섭 대상이다. 툭하면 파리가 테러 무대로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연 마크롱이 이런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우선 마크롱이 내세우는 유럽주의와 친이민 정책, 노동 유연화와 감세를 통한 경제성장, 직업교육을 통한 청년 일자리 창출 등은 프랑스의 전통과 상당 부분 배치되는 것이다. 전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밑에서 경제장관을 역임하면서 시장 친화적 경제정책을 펴려다 실패한 것이 바로 그가 대선에 출마하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그 앞에 놓인 장애물은 어마어마하지만 16살 나이에 24살 많은 유부녀 교사에게 청혼해 10년 만에 승낙을 받아낸 집념이라면 못할 일도 없어 보인다. 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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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