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미국역사(151)제29대 Warren G. Harding 대통령과 각료들의 부패②

2017-04-07 (금)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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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에는 Harry Daugherty 가 임명 되었는데, 그는 오하이오 주와 공화당 대통령 공천대회에서 Harding 이 대통령이 될수 있도록 잘 뒷바라지를 하고 Harding 의 선거사무장으로써 공적을 높인 것 이외에는 별 경력이 없던 사람이었다.

이와같은 부적절한 임명들이 시작되자 Harding 이 무능하고 부패한 자신의 졸개들을 각료로 임명한다는 비난이 일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모여서 국가정책을 논의하기 보다는 카드게임에 더 열중한다는 오하이오 갱 이라고 불렸다. 그들의 무절제한 사리사욕을 위한 부패때문에 약체정권이었던 Harding 정부는 무능력한 정부라고도 평가 되었다.

국내정치에도 미숙한 인물이었던 Harding 에게는 국제정치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엄두도 내 볼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Harding 은 단호한 결단력이 있는 정치인인 것같은 언동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그는 전임 Wilson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여 성사를 해보려고 했던 League of Nations 에 관심조차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국제분쟁이 일어 났을 때에 강제성을 가지고 문제해결에 직접 개입할 수도 있는 League 에 미국이 참가 하는것은 반대하며 그런 기구는 단순한 협의체 (Association)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구세계 (유럽) 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들들에게 우리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라고 요청할 것이며 결코 그들이 구세계의 적체되어온 분열과 과욕들에서 야기된 문제들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희생하라고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상원의 비준을 받지 못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협정인 Versailles 평화조약을 무시하여 버렸고 전쟁이 끝나고 거의 3년이 지난 1921년 7월 2일에 독일과 별도의 정전조약을 맺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열국들에게 준 교훈은 다시 세계대전 같은 국제분쟁이 일어나면 어느 한 나라 만이 전쟁을 피해서 평화롭게 지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국가가 평화롭게 존립하기 위해서는 군비, 특히 해군력을 강화하여야 무역과 국방을 차질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가 간의 군비경쟁은 불가피하다는 생각들이었다.

도서국가인 영국과 일본은 해군력 강화의 필요성에 민감하였고 양대양을 좌우편에 가지고 있던 미국도 이 문제에 예민하기는 마찬가지이었다. 엄청난 살육 끝에 세계 평화가 돌아왔으나 다음 전쟁을 위한 경쟁적 군비강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미국 국민들은 이 새 전쟁준비를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미국 국민들의 정서를 이용하여 Harding 은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선도자적 역할을 강조하지 않았고 차라리 국제, 국내정치에 애매한 정책을 내거는 소극적인 선거운동으로 일반 투표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1921년 가을에 Harding 대통령은 Hughes 국무장관의 제의를 받아드려 극동 아시아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9개 열강국들의 대표들을 Washington 으로 초청하여서 그들의 협상으로 세 개의 국제조약들이 맺어졌다.

첫째조약은 5대강국조약으로 강대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 영국, 일본, 불란서, 이태리등이 참가하였는데 5개국은 만톤급이 넘는 군함들 총 2백만톤을 감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후에 미국과 영국은 50만톤, 일본은 30만톤, 불란서와 이태리는 각각 17만5천톤 이하로 군함을 유지하기로 합의하였다. 또 5개국은 Hawaii 를 제외한 태평양 지역의 모든 소유지역에 해군기지를 더 증축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이 조약의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는 오랜기간 동안 서방강국들의 간섭이 없이 일본이 태평양의 초대강국이 되는 기회를 준 것이었다.

둘째조약은 소위 9대강국조약 이란 것으로서 각국이 중국과의 무역을 상호보장하기 위하여 중국시장을 개방하자고 하였고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여서 중국의 영토나 특별혜택을 취하지 않도록 한다는데 동의하였다. 주인의 허가도 없이 남의 부동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다른 동네 깡패들끼리 협상을 맺은 것이었다. 하기사 그 덕분에 중국은 국가의 완전 멸망을 면하기는 하였다.


셋째조약은 영국이 일본과 맺은 동맹약속을 해약시키고 미국, 불란서, 영국, 일본등 4개국이 당시 태평양지역에 소유한 지역들을 상호존중하고 앞으로 극동지역에서 생기는 분쟁은 합동회의에서 조정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토지문서도 없는 깡패들 끼리 싸우지 말고 남의 땅을 나누어 먹자는 약속이었다.

놀랍게도 미국의 상원은 이 세 조약을 다 비준하였다. 상원의원들은 이 조약들에 의해서 병력까지 동원해야 하는 동맹이나 상호방위조약으로는 취급할 수 없다는 반대의견들이 많은 채로 통과시켰다. 이 Washington Naval Conference 와 그때 맺어진 세개의 국제조약은 Harding 의 외교적 성과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회담은 근대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군축회담이지만 이 조약들이 지켜지지 않았을 경우에 조약을 강제 집행할 방도는 없는 조약이었다.

미국이 앞장선 이 조약들로 일본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횡재를 얻은 셈이었으나 미국과 일본과의 국제관계는 별로 호전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일본인들의 미국이민 을 금지한 The Immigration Act of 1924 를 계속 국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Harding 대통령이 남겨 놓은 몇 가지의 업적이 있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던 해인 1921년 4월에 국회를 소집하여 예산제도의 개선과 경기호전을 위해 여러 가지의 입법과 정책을 제정하게 하였다.

그때까지는 각 연방부서의 예산은 각각 별도로 수립되어 연방정부의 총 세입과 세출이 얼마나 되는 지를 한눈에 볼 수가 없었다.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국회는 예산 및 회계법 (Budget and Accounting Act) 을 입법하여 예산청 (Bureau of Budget) 을 신설하고 모든 연방부서가 예산청에 예산안을 제출하여 예산청은 한 문서로 연방정부 총예산을 국회에 제출하도록 되었다. 또 이 법에 따라 국회소속으로 “감사원” (General Accounting Office” 를 신설하여 감사원장 (Controller General) 의 지휘로 연방정부의 예산집행을 감사하고 예산절약을 위한 제안을 국회에 하도록하여 현재까지 잘 운영이 되고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

연방정부의 예산집행 과정을 대통령휘하의 감사원이 아니라 국회에 소속된 감사원이 하도록 한 것은 삼권분립이 현실정치에서 실행되도록 한 아주 모범적인 제도이다. Hoover 상무장관의 제안으로 그때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였던 radio 의 주파수와 방송면허 등을 연방정부가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말에 끝난 후부터 미국은 경기호황기에 들어섰지만 전시경제에서 평화시의 정상적인 경제로 체제가 바뀌어 가면서 1920년에는 불경기가 시작될 수 있는 조짐을 보였다. Harding 은 불경기를 예방하는 정책으로써 “수입관세인상, 세금인하, 세출의 감소, 불구제대군인과 농민들에 대한 지원등”을 입법 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먹은 약이 더러 잘못되어 독약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Harding 의 수입관세 인상은 그가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역효과를 내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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