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미국역사(148)3등시민들 (새 이민자와 흑인)에 대한 차별대우 부활

2017-03-17 (금) 조태환/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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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mer 검찰총장이 하는 짓을 보고 덩달아 흥분했던 일부 일반 국민들도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이성을 잃은 공포심이나 분노심을 가지고 박해를 노골적으로 하였다. 이 다른 사람들에는 개혁주의자들 이외에 흑인, 유대인, 천주교인들이 포함되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 이민 감축을 주장해오던 Immigration Restriction League 는 전쟁중에 드디어 “모든 이민은 문자를 읽을 줄 알아야 된다” 는 법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얼른 듣기에는 미국의 문맹률을 낮추자는 고매한 취지가 그 법의 입법동기처럼 보였지만 진정한 이유는 매우 불순한 것이었다.

초창기의 미국이민들은 대부분 교육과 문화 수준이 높았던 북쪽과 서쪽의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소위 앵글로 색슨이라는 미국의 주류이다. 때로는 WASP (White Anglo Saxon Protestant) 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자신들이 우수한 사람들이라는 과학적인 편견을 가지고 심각하게 민족적, 종교적, 인종적 차별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1890년 부터 1910년 사이에 잡다한 유럽인들이 이민으로 몰려오기 시작하자 바짝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러시아, 폴랜드, 이태리 등의 동쪽이나 남부 유럽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막아보려고 노력해 왔었다. 그곳에서 오는 이민자들 대부분이 문맹자들임을 알고 “글자읽기를 이민조건으로 내세웠던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 열렬한 이민제한 주의자들 중에는 대학교 총장을 위시로 저명한 New England 지도자급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규정은 오랫동안 존속되었다.

이민제한의 문턱은1921년부터 한층 더 높아졌다. National Origins Act of 1924 가 입법되어 1929년까지 매년의 이민수를 15만명으로 제한하였고 각국에는 1920년 당시의 미국 인구의 출신별 국가의 비율에 따라 쿼터가 배정되었다.

1920년에는 미국민들 중에 북서유럽 출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으로 자연히 북서유럽인들에게 쿼터가 많이 배정되었고 동남부유럽인들의 이민은 제한되도록 되었었다. 이 법의 부차적 피해자들은 아시안들로써 중국,일본등 아시아 제국의 이민문호는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다.

동양인들에 대한 이 차별적 쿼터제도는 1965년 이민법 대개정 때까지 계속 존속해 있었다. 이 쿼터 제도에서 Canada 와 Latin America 는 제외되어 있어서 1920년대에 첫 번째 대규모의 멕시코 이민이 있었다.

위에 언급한 문맹이민제한이 선량한 국민들에 의한 합법을 가장한 새 이민차별 이었다면 미국내에서는 이미 미국에 와 있는다른 사람들을 테러와 폭력으로써 학대 하는 부류의 불량자들이 다시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남북전쟁 직후에 기승을 부렸다가 거의 소멸되어가던 Ku Klax Klan (K.K.K.) 이 남부와 서부에서 부활하기 시작하여서 한때에는 450만 명의 세력으로 까지 커서 몇개주의 정치를 지배하기까지 하였다. KKK는 중하류층의 미국출생 불량한 백인들이 주종을 이루었으나 상당한 수의 기독교 목사들과 사회지도급 인사들 중에서도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쟁후의 높아진 실직률과 사회적 혼란의 책임을 져야할 속죄양으로 흑인, 유대인, 천주교인들과 모든 외국인들을 처벌 했어야 했다. 그들은 “우리는 The Best People 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것 뿐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갖은 악랄한 방법과 폭행, 방화, 살인등으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폭행하였다. 경찰, 검찰, 판사들 중에도 KKK 동조자들이 있어서 이들의 만행이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1925년에 Indiana 주의 KKK 두목이 자기의 비서를 살해한 죄로 기소되면서 KKK 의 만행들이 언론에 대서폭로되기 시작하였고 KKK 의 세력이 다시 소멸되어 갔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KKK 의 잔재는 잠복하고 있는 악균처럼 근절이 되지 않아서 2016년의 대통령선거 때에도 그들은 트럼프후보를 지지한다고 소리를 내었다.


1950, 1960년대에 남부쪽으로 유학을 왔던 한국 유학생들은 공중변소에서 “white” 용을 써야하는지 “colored” 용을 써야 하는지 잠시 주저했던 경험들이 있다고 얘기 하는 것을 들었다. 흑백차별, 인종차별이 1800년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민권법들이 엄연히 제정된 후에도 지역에 따라서는 실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종차별 하면 남부백인들이 흑인 노예나 유급노동자들을 학대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타인종뿐만 아니라 같은 백인들간에도 이민연도와 출신국가에 따라 차별이 실행되고 있었다 .

불과 몇 십년 전 까지만 해도 미국 남부에서 백인여성 강간살인 같은 끔직한 사건이 발생하면 범인을 빨리 체포하라는 시민들의 압력을 받은 경찰과 검찰은 무고한 흑인을 잡아서 졸속한 재판으로 사형언도 후 곧 사형해 버리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배심원 재판에서도 배심원 전원이 Lily white 이어서 흑인은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였다.

위와 같은 억울한 일들이 흑인에게만 행해졌던 것은 아니었다. 1920년에 Massachusettes 의 어느 도시의 구두공장에 강도들이 들어와서 봉급 담당직원과 경비원을 살해하고 직원들의 봉급을 강도해간 일이 있었다. 경찰은 전과가 전혀 없는 두 이태리계 청년 Nicola Sacco 와 Bartolomeo Vanzetti 를 전격적으로 체포하였는데 그들은무정부주의자 들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범죄 혐의가 없는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은 무정부주의자 같은 과격분자들과 외국인들에게 극도로 신경과민이었을 때였다. 그들이 이태리인이고 천주교인인 “외국인” 이라는 것이 아마 더 근본적인 죄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들이 사형언도를 받게되자 강한 반대여론이 일어났고 주지사가 1927년에 사형언도 재심사를 명하였으나 앵글로 색슨족들인 하버드대학교 총장을 포함한 조사위원단은 두 사람이 공평한 재판을 받았다고 결론을 지었고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미국의 부끄러운 인종차별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슬픈 일화이다.

1920년대의 미국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하는 과정에서 호황과 빈부의 격차심화, 사회정의와 부조리, 개혁과 혼돈, 부당한 인종차별, 이성을 잃은 이념 대립 등등으로 혼란 스러울때에 낙오하고 억울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미국의 어두운 쪽을 훑어 보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예리한 관찰력과 글재주를 가진 언론인들과 작가들이 활약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미국사람들이 성공에 도취되어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에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제도 등에 허구성을 지적하고 장래를 걱정했다. 이들은 미국의 현실정치를 보고 미국의 민주주의가 과연 “민주적이냐?” 라고 비판하였다.

미국출생의 시인 T.S. Eliot 는 제1차 대전후의 미국을 ‘황폐해진 땅’이라고 혹평하며 영국으로 옮겨가 버렸다. 이 시대에 사회비판을 주제로한 작품들로 장안의 지가를 올린 사람들이 Sinclair Lewis, F. Scott Fitzgerald, William Faulkner, Ernest Hemingway 등의 작가들과 극작가 Eugene O’Neill 등이었다.

이 무렵에 제1차 세계대전의 부산물로 역사적인 정치개혁이 이루어진다. 미국여성 들은 처음부터 참정권은 있어서 이미 1800년대에 몇 명의 여성 주지사들이 있었지만 투표권은 없었다. 물론 말도 안되는 전통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남자들의 노동력이 모자랐을 때에 여성들이 공장, 사무실 등에 나가서 그 전에는 남성들만 할 수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일들을 훌륭하게 해내자 “그래도 여성의 투표권만은 안 된다” 라고 주장할 명분이 없어졌다.

개혁주의자들이 오랜동안 주장해오던 ‘여성투표권’은 1919년에 윌슨 대통령이 적극 지지하고 나서면서 국회를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하였고 그후 14개월 만에 ‘여성투표권’이 36주들의 동의를 얻어 연방헌법 제19개정조항이 되었다.

<조태환/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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