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47)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의 혼란

2017-03-10 (금)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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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뒤늦게 참전하여5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나 전쟁이 연합국 측의 승리로 끝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미국 자체의 전비와 연합국들 에게도 전비를 대여해 주느라고 엄청난 지출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미국에는 여러 가지 사회변혁이 있었고 제도의 개선이 있었으며 국민들의 단결도 있었다.

전쟁중에 연합국들의 식량과 군수물자들을 미국이 많이 조달하였음으로 미국의 경제는 활성화 되었다. 전쟁이 끝난 1918년부터 1925년 까지는 미국의 경제에는 boom 이 일어났고 1926년부터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날 때까지도 경제는 아직은 호황상태이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에는 사방에서 라디오와 유성기의 소리가 울려퍼지고 영화관에는 활동사진을 보려고 모여드는 관객들로 붐비기 시작하였다. 미국사람들의 자동차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발목이 보일 정도로 올라간 것이 “흉칙스럽다” 라고
했던 여성들의 스커트가 드디어 종아리가 다 드러나도록 높아졌는가 하면 “양가집 규수” 들도 머리를 마구 짤라 단발머리를 하고 입술에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다니기 시작 하였다.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담배까지 피우기 시작하자 “허, 올 것이 다 왔구만!” 이라고 개탄하는 구세대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바로 미국적인 것이었다. 1920년대는 대립, 혼동, 흥분, 실험의 시대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누구나 모 든것을 다 한번 쯤은 해볼 수 있다는 자유분방한 새 나라 미국을 상징하는 생활이었다.

한편 유럽의 분규와 불만에서 시작되었던 전쟁의 종식은 더 심각하고 어렵고 새로운 문제들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종전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기아와 사망이 속출하였고 각국에서 홍수처럼 혁명들이 일어났다. 유럽 전역에서 불만에 가득 찬 국민들이 정부의 전복을 시도해서 공장들과 의회들이 혁명의 열기로 불붙고 있었다. 유럽의 이같은 민중반역의 불씨가 미국에까지 튀어 올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미국에도 있었다.

1917년 3월에 Alexander Kerensky 가 이끄는 온건파 공산당원들이 제정 러시아를 전복 하고 임시정부를 세웠으나 11월에 Vladimir I. Lenin 이 이끈 공산당 강경파 Bolsheviks 가 Kerensky 를 실각시키고 소련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을수립했다. 서방국가들은 이 새 “요물”을 겁내었고 공산주의를 싹일 때에 잘라버려야 한다고 생각 하였다.

1918년부터 20년까지 계속된 소련혁명 초기에 미영불과 일본은 북부와 동부 러시아에 러시아 안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때 일본은 동부 시베리아 지역을 눈독들이고 있었다. 소련이 수립된 후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을 곧 중단하였다. 소련과 서방세계와의 대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소련은 서방세계를 극도로 불신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설립된 미국의 공보위원회는 꾸준한 홍보활동으로 미국사람들이 “비미국적”인 모든 것을 신뢰하지 않도록 교육시켜왔다. 종전후 공산주의라는 괴물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전복시키고 있는 것처럼 미국사람들에게 보였는데 미국에 나약하나마 공산당이 창립되자 더욱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쟁 중에는 노사정이 최대한으로 협력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전쟁준비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끝나자 노사간의 휴전은 곧 열전으로 돌아섰다. 노동자들은 전쟁중에 인상된 모든전시중의 혜택들이 전후에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치솟고 있는 물가에 대해서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점점 강해지다가 드디어1919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연 4백 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서 총 20억달러 어치의 상품판매와 노임 손해가 발생하였다. 때로 폭력적이기도 하였던 노조의 파업들이 미국민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1919년 가을 보스턴에서 경찰관들이 파업을 하자 시내 도처에서 상점약탈이 있었고 폭행들이 일어났다. 보스턴 시장이 지원을 요청하자 매사추세츠 주지사 Calvin Coolidge 는 주방위군을 동원하여 질서를 회복하였다. 그는 “그 누구이든 간에 어느 때이고 어느 장소이던 국민의 안녕 질서를 훼손하는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라고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그와 같은 선언과 단호한 진압으로 그의 명성이 전국에 높아져서 Coolidge 는 192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부통령후보로 공천을 받게 되었다.

노조의 강경성이 사면초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강성노조는 기업체, 정부, 법원, 일반국민들의 반대를 받아서 1921년에 500만명이었던 노조회원들의 숫자가 1929년에는430만 명으로 줄어 들었는데 그 기간 동안에 비농장 노동인구는 700만 명이나 늘어났다.

전쟁중 흑인들은 전장에서 군인으로, 공장에서 노동자로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고질적인 병폐인 흑인학대가 다시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에 사방에서 70명의 흑인들이 백인들에 의해 불법 ”교수”(lynching) 를 당했는데 그중 10명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었다.

1919년 여름에 25군데에서 인종충돌이 있었다. 그중 최악의 충돌이 시카고에서 일어났다. 해변에서 흑백간에 충돌이 시작되어서 엿새 밤낮동안 폭동이 있었는데 수백 명이 부상을 당하고 백인 15명, 흑인 23명이 사망 하였다. 거떡하면 총기를 쉽게 잘 휘둘렀다는 A. Mitchell Palmer 연방 검찰총장은 미국 도처에 공산세력이 침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시카고 폭동 참여자들과 자기가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 공산주의 불순분자들이라고 매도하였다.

또 한편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사실상 전국 도처에서 폭발물 terrorism 이 일어나고 있었다. 1919년초에 Seattle 시장은 시내의 총파업단속을 위한 조치를 취해 놓았는데 4월 말에 누가 폭발물을 시장에게 우편으로 배달하였으나 다행히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조지아 주 연방상원의원집에 소포가 배달되어 하녀가 개봉을 하던 중 폭발하여 두 손이 날아간 일이 있었고, 이와 같은 폭발물 36개가 우편국에서 발견되었는데 모두가 우표 미달로 미쳐 배달되지 않았던 것들이 었었다.

미국인들을 더욱 놀라게 하였던 일은 이 폭발물들의 수신인들이 Palmer 검찰총장, 우정성장관, 노동부장관, J.P. Morgan, John D. Rockefeller 등이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미국의 권부와 재벌들의 상징을 겨냥하였던 폭발물들이었다.

그 한달 후 쯤에는 더욱 심각한 폭발물 사건들이 있었다. Palmer 검찰총장에게
폭발물을 배달하려고 왔던 사람이 Palmer 의 집 앞에서 폭발물이 폭파하는 바람에 폭사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처참한 폭파사건이 뉴욕의 금융가 심장부에서 일어났다. 1920년 9월 16일 정오에 뉴욕증권 거래소가 있는 Wall Street 과 Broad Street 의 모서리 에서 큰 폭발물이 폭발하여 점심을 먹으러 나왔던 사람들 38명이 폭사했고 수백 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불행하게도 Palmer 검찰총장이란 사람은 조급하게 오판을 쉽게 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일련의 폭발사건들을 무조직한 Terrorist 들의 소행으로 보지않고 미국이 Bolsheviks 와 무정부 주의자들에 오염되어 당시에 일어나고 있던 노동파업, 인종폭동, 폭발사건들이 그들이 미국을 전복하고자 하는 혁명음모의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모든 외국인들은 폭발범으로 변신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Palmer 는 자기가 미국을 구국한 영웅으로 알려져서 백악관 입성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작년내내 대통령 선거중에 Palmer 와 비슷하게 “외국인 공포 혐오증” 을 팔고 다니던 사람이 지금은 대통령이라고 백악관에 버티고 앉아서 이제는 국제적인 헛소리까지 매일 해대고 있는것을 보면 당시 Palmer 가 꼭 허망한 소리를 했던 “어리석은” 사람이었다고만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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