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름 가득한 남국에서 겨울의 색을 만났다‘. 화이트 템플’로 알려진‘왓롱쿤’은 백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준다.
태국 북부 내륙 치앙라이의 한낮은 여전히 강렬하게 타올랐다.
이곳 사람들에게도 겨울이다. 남국의 겨울에선 한없이 짙어졌던 엽록소가 잠시 옅어질 뿐 황량해지지 않는다. 추수를 마친 들판도 여전히 푸르다. 그들의 겨울은 계속 뜨겁다.
강렬한 태양빛을 가리는 가로수 사이사이 차갑게 얼어붙은 성이 보인다. 순백의 조각이 커다란 잎사귀 사이로 눈부시게 빛난다. 푸르름 속 홀로 차가운 ‘겨울의 색’을 띤 이 건물은 녹색의 산과 벌판으로 지루해진 시각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사원의 입구는 구원을 열망하는 몸부림이 수백 개의 손으로 표현한 지옥이다.
▦예술혼 가득한 백색 사원
뜨거운 태양 속 차가운 기운이 반갑게 느껴지는 이곳은 ‘화이트 템플’로 더 잘 알려진 ‘왓롱쿤’이다. 빨강 초록 파랑 등 채도 높은 열대의 컬러 속 무채색 백색 건축물은 얼핏 열대지방 속 ‘겨울왕국’을 연상시킨다. 우주선이 불시착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서울의 어느 곳 마냥 생뚱맞게 보일 법도 하지만 주위의 풍경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국인의 삶과 문화가 배어서일까. 부처의 자비가 담겨서일까. 왓롱쿤은 이국적이지만 낯설지 않고 이색적이지만 어색하지 않다. 크지 않지만 웅장하고, 작지 않지만 아담하다. 녹색 빛 가득 품은 커다란 나무와 함께 담아봐도, 맑고 투명한 파란 하늘에 넣어봐도, 잔잔히 물결치는 호수에 비춰봐도 흰 빛깔의 가치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 하얀 사원은 치앙라이의 불교 화가이자 건축가인 찰름차이 코싯피팟(62)의 작품이다. 소년원을 들락거릴 정도로 문제아였던 그가 죄를 갚기 위해 무너져 가는 사원을 허물고 자비 4,000만 바트(약 13억 3,000만원)를 들여 1997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지옥, 현세, 극락에 이르는 과정을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했다. 절망에 쌓인 지옥에서 절규하는 중생은 수백 개의 손과 팔이 요동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손마디가 살아 움직여 발목을 잡아 챌 것만 같다. 가운데 손가락만 편 조각에선 작가의 익살과 재치도 엿보인다. 지옥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면 현세다. 아직 불구덩이다. 둥근 지구를 묘사한 사원 내부에는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슈퍼맨, 손오공 등 영화 속 영웅이 재앙에 맞서 싸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불구덩이의 한가운데 가부좌를 튼 승려가 미동도 없이 수행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야 비로소 극락이다. 극락에 이르면 순결한 백색 위에 투명한 은빛이 쏟아진다. 이름 모를 갖가지 꽃이 피었고 영검한 동물들이 춤을 춘다. 하지만 천당에서 누리는 시간은 길지 않다.
천당에서 조금 옆으로 나오면 ‘진짜’ 현실과 마주한다. 이 사원은 아직 공사 중이다. 밋밋한 흰 건물 표면에 장식물을 입히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아무리 둘러봐도 실제 승려는 보이지 않는다. 관광지일 뿐 아직까지 종교기관은 아니라는 말이다. 왓롱쿤은 앞으로 승려가 머무는 공간과 박물관 등 부속건물을 더 짓고 ‘진정한 사원’으로 거듭날 계획이다.
치앙라이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시계탑에 조명이 비치고 있다.
▦인공미 넘치는 싱하파크
왓롱쿤이 종교와 예술의 공간이라면 약 5㎞ 정도 떨어진 싱하파크는 상업적 냄새 물씬 풍기는 공간이다. 싱하파크는 태국 양대 맥주 제조회사 중 하나인 싱하그룹이 조성했다. 거대 자본이 계획적으로 설계하고 만든 만큼 인공미가 가득하지만 ‘날 것’보다 ‘가공된 것’에 더 익숙한 도시인들이 즐기기엔 오히려 제격이다.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요즘이 이곳에서도 활동하기 가장 알맞은 계절이다.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호수 옆을 지나 낮은 언덕에 올랐다. 둥그스름하게 잘 다듬은 언덕에 코스모스 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아침 이슬 머금은 꽃잎에 손끝이 닿을 때마다 촉감이 싱그럽다. 말끔하게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곧 뜨거워질 아침햇살이 차(茶) 밭을 가득 채운다. 적당하게 푹신한 잔디밭을 걷다 보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이 모든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야외 카페로 자리를 옮긴다. 미세먼지 없는 청량한 공기에 마음 속까지 상쾌해진다. 연유 듬뿍 넣은 태국식 커피에 휴식이 더 달콤해진다.
자전거로 공원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한낮에 태양이 뜨거워도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면 제법 시원하다. 싱하파크는 자전거 대회가 수시로 열릴 만큼 자전거 친화적인 공원이다. 차량이나 보행자에 방해 받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페달을 밟을 수 있다. 얕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돼 지루하지 않고 재미도 좋다. 공원 한 바퀴는 약 6㎞, 느린 속도로 30분 정도 걸린다. 이 정도면 적당히 갈증이 오르고 시원한 맥주가 생각난다. 싱하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기 딱 좋은 시간이다.
치앙라이 시내 중심에 위치한 야시장.
▦치앙라이의 차분한 밤
치앙라이의 밤은 차분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산만하지도 않다. 야시장의 상인들은 온화한 미소를 지을 뿐 소리치며 손님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테이블 수십 개가 놓인 광장은 시끌벅적하지 않고 도란도란하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술과 음식을 재촉하는 손님도, 정신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점원도 없다. 광장의 사람들은 무대 위 가수가 태국식으로 부르는 팝송 선율처럼 부드럽고 느긋하다. 천천히 얘기하고 천천히 움직인다.
길 위도 마찬가지다. 급하게 움직일 이유가 없다. 그저 흘러간다. 경적 울리며 서로 먼저 가겠다는 이 하나 없다. 수십 분째 손님을 기다리는 뚝뚝 기사들의 얼굴도 짜증 하나 없이 따뜻하기만 하다. 마음이 편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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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라이(태국)= 김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