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38)1912년의 대통령선거:Taft, Roosevelt, Wilson

2017-01-06 (금)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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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Roosevelt 는 Taft 가 대통령에 취임한 얼마후 동 아프리카 로 장기 사냥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Roosevelt 가 20년 만에 처음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즐기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그가 퇴임후 Taft 의 정치에 개입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완전하게 불식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가 장기의 사냥끝에 1910년 봄에 나타나자 전 서방세계의 이목이 그에게 다시 집중되었다. 그가 이집트, 이태리, 오스트리아, 독일, 불란서, 홀랜드, 영국 등을 지나가는 모습은 개선장군 같았다고 하며 1910년 6월에 뉴욕에 돌아오자 많은 군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환영하였다고 한다.

약관 51세이었던 아직 젊은 나이인 Roosevelt 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정치인의 기질을 억누르고 그늘에서 조용히 지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1년이 조금 넘은 그 동안에 Taft 정권 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Pinchot 는 Ballinger 사건 때에 Taft 가 취한 행동은 부당하다고 호소하였다. 심기가 불편해진 Roosevelt 는 곧 전국순회 연설에 나서서 Taft 를 비난하고 국회의 “반란군”들을 칭찬하였다.


드디어 1910년 8월에 Roosevelt 는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개혁들에 새로운 개혁 들을 추가한 “새 국가주의” (New Nationalism) 를 주장하고 나섰다. 새 국가주의에는 기왕에 그가 주장해오던 대기업들의 강력한 단속에다가 “진정한 관세제도개혁”을 추가 하였다. 동시에 그는 선거자금의 공개, 연방소득세와 상속세의 신설, 전국적인 종업원 상해보험제도 채택, 근로여성들의 최저임금과 어린 아이들의 노동금지, 국민이 직접 참여 하는 공천제도, 국민 입법발의제도, 국민투표, 공직자 소환제도등 Taft 가 반대하던 항목 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1910년의 총선거 (대통령을 제외한) 는 내분이난 공화당의 취약점이 그대로 반영된 선거이었다. 민주당은 18년 만에 하원의 다수당이 되었고 상원에는 공화당이 다수당이었지만 공화당 상원의원 여러 명이 진보주의 반란군이었던 까닭에 Taft 는 양원의 협조를 쉽게 받기가 어렵게 되었다. 주지사 선거에서도 공화당은 8개주에서 민주당에 패배하였고 뉴저지 주지사에는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인 민주당의 Woodrow Wilson 이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총선거에서 대패한 공화당의 진보주의 “반란군” 들은 이제 자파가 공화당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제1차적으로 선호하였던 후보자는 Wisconsin 주의 진보주의 주지사 “Bob La Follette” 이었었다. Roosevelt 는 La Follette 를 지지하지 않았고 Roosevelt 의 지지자들은 그가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종용하기 시작하였다. Roosevelt 는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곧 마음을 바꾸어 출마하기로 결정하였다. 정치밖에 할 줄 모르는 그의 용단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는 1912년 2월에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공표했다.

시카고에서 개최된 공화당 대통령후보 공천대회에는 당내의 보수파와 진보주의파 대의원들이 참석 하였는데 주도권을 잡았던 Taft 가 대통령후보로 공천되었다. Roosevelt 를 지지했던 진보주의파 대의원들은 공천대회가 사기극이었다고 분개하면서 대회장에서 빠져나온 후 다른 회의장에 모여서 Roosevelt 에게 진보주의 신당을 창당할 것을 열렬히 요구하였다

한번 칼을 뽑으면 무엇이든지 베고 난 후에야 칼을 칼집에 넣는 성격인 Roosevelt 는 곧 앞장서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특권층에 지배되고 있는 정부하의 아마겟돈 에서 허덕이고 있다. 주님을 위해서 함께 일어서자!” 라는 선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수주일 후 새로 창당된 진보주의정당 Progressive Party 는 Roosevelt 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한 후 “The Battle hymn of the Republic,” “Onward Christian Soldiers” 등의 찬송가를 불르며 기세를 올렸다.

어느 기자가 Roosevelt 에게 “건강은 어떻소?” 라고 질문하자 그는 Bull Moose (황소보다 더 큰 숫사슴으로 미국에서는 건장하고 정력적인 남성의 대명사로 쓰임) 처럼 건강하오!” 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이 곧 번져나가 Progressive Party 를 Bull Moose Party 라고도 부르기 시작하였고 당에서도 Bull Moose 를 당의 상징으로 쓰며 “the New and Nobler Commonwealth” 를 건국하자고 기염을 토했다.

한편 볼티모어에서 대통령 공천대회를 가진 민주당은 공화당의 분열을 보면서 승전의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앨라배마 주의 Oscar Underwood 하원의원은 남부지역의 지지를 받았고 신문왕 William Randolph Hearst 와 기타의 부자 당원들의 지지를 받은James Champ Clark 하원의장도 강력한 후보이었는데 세째로는 겨우 2년 전에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을 하다가 뉴저지 주지사에 당선되었던 학자풍의 Woodrow Wilson 주지사가 있었다.


Wilson 이 뉴저지에서 실행한 여러가지 개혁정책과 그가 역설한 미국의도덕적 부활 등이 대의원들의 주목을 끌었다. 대회초기에는 Clark 하원의장이 우세해 보이기도 하였으나 엎치락 뒤치락 거리던 투표 끝에 Bryan 의 지지를 받은 Wilson 이46번째의 투표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다.

1912년의 총선거에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출마하는 사회주의자 Eugene V. Debs, Taft, Roosevelt, Wilson 등 네명이 출마하였으나 불꽃 튀는 전투는 Roosevelt 와 Wilson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양당은 자연자원의 보호, 은행과 화폐제도의 개선등을 주장하였다.

공화당은 관세제도의 소폭개정을 주장하였으나 민주당은 관세율을 대폭 인하할 것을 주장하였다. 공화당은 독점 Trust 를 통제만 하자고 하였으나 민주당은 모든 독점기업은 해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Roosevelt 와 Wilson 은 근본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이었지만 두 사람 간에는 분명한 차이점들이 있었다.

Roosevelt 는 미 국민들이 이제는 미국이 “개인주의나 구습의 민주주의 제도는 통하지 않는 신시대 (New Age)에 도달했음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공업화, 도시화된 사회인 미국은 강력한 국가정부가 기업을 규제하고 국민들의 복지를 보장하는 신국가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수많은 사회복지제도 입법을 열거한 Bull Moose Party 의 선거공약을 열심히 설명하였다.

정치경력이 별로 없었던 Wilson 은 막상 후보공천을 받았을 때에는 Roosevelt 처럼 잘 정리된 정책이 없었으나 선거운동을 해나가면서 그가 New Freedom 이라고 부르던 정책을 설명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정책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었다. 그는 가장 적절한 정부의 역할은 엄정한 심판이어야 하며 기업가들과 노동자들은 모두 독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Roosevelt 식 신국가주의는 기업이 정부를 장악 해서 국민들을 노예화 시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Sherman Antitrust 법을 더 강력히 집행하여 진정한 자유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흥사같은 호소력으로 개인주의와 제약 없는 기회균등이 실천되어야 하며 그의 New Freedom 정책은 이미 성공한자들 보다는 앞으로 성공할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Roosevelt 의 출마는 공화당을 분열시켰고 결국 민주당이 승리하도록 만들었다. Wilson 은 42% 를 득표하였으나 48개주중 40주에서 승리하였고 선거인단 표 수로는 80% 를 받았다. 그러나 Wilson 과 Roosevelt 가 받은 합계 득표수는 천만 표이었는데 비해서 Taft 는 350만 표, Debs 는 100만 표에 그쳐서 국민들은 진보주의적 개혁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났다.

판사가 더 성격에 어울려 보였던 Taft 는 후일 제29대 Warren G. Harding 대통령에 의해 1921년 연방대법원장에 임명되어 1930년에 사망할 때까지 근속했는데 그는 미국대통령 중 유일하게 대법원장도 지낸 사람이 되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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