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35) 제26대 Theodore Roosevelt 대통령 ⑤

2016-12-16 (금) 조태환
크게 작게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35) 제26대 Theodore Roosevelt 대통령 ⑤
미국은 Panama 운하건설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1900년대 초부터 Caribbean 바다의 작은 섬나라들과 Panama 운하주변 나라들의 정치, 경제적 안정에 심각하게 신경을 쓰게 된다.

“우리가 느그들 동네일에 상관하지 않을 것인께로 느그들도 우리동네 일에 간섭하지 말드라고!” 라는 Monroe 주의를 일찌기 내걸었던 미국은 이제는 그 정도만으로서는 안심이 되지않아서 “Roosevelt 주의” 를 공포하게 된다. Teddy 는 1904년 12월 국회에 보낸 교서에서 “미국은 앞으로 Latin America 나라중 어느나라가 지속적인 재정의 악화나 기타의 이유로 국가가 위태로워질 경우에는 즉시 개입해서 질서를 잡는 경찰역할을 할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일체 불허한다는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Teddy 는 이 “Roosevelt 주의” 를 곧 실천 하였다. 그무렵 Dominican Republic 이 재정의 악화로 국가파산의 위기에 몰리자 유럽의 채권자들은 무력을 동원해서 빚을 받아 내겠다고 위협하였다. 미국은 Dominica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서 유럽채권자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그 나라의 재정을 바로잡아 주었다.


물론 미국이 항상 이처럼 천사같은 일만 했던것은 아니었지만 후대의 미국대통령들도 대개 Teddy 의 라틴 아메리카 정책을 지속해서 존중해 오고 있다. 이 Roosevelt 주의에 따라 미국은 그동안 Dominica, Cuba, Panama, Haiti, Nicaragua 등의 나라들에 가서 “국제경찰” 노릇을 여러 번 해오고 있다. Fidel Castro의 혁명으로 Cuba 의 공산국가화를 막아내지는 못하였지만 소련이 Cuba 에 미사일을 설치하자 John F. Kennedy 대통령이 제3차 세계대전의 위험을 무릅쓰고 종국적으로 미사일을 철수시켰던 것도 미국이 Roosevelt 주의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Monroe 주의와 Roosevelt 주의의 선언으로 남북 미대륙을 미국의 영향권안에 “확보” 하게된 “해결사” Teddy 는 미국이 이제는 세계최강국답게 유럽의 분쟁도 중재하는 역할도 해볼 수 있다는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마침 불란서와 독일은 Morocco 를 지배하기 위한 불화끝에 전쟁 일보직전의 상태에 와 있었다.

애초에는 개입에 주저하였던 Teddy 는 유럽국가들간의 적정수준의 불화와 세력균형이 미국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 판단하고 양국을 설득해서 1906년에 Spain 의 Algeciras (Algeciras Conference) 에서 회동하도록 하고 미국의 중재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하였다. 이제는 미국이 딴 동네 아이들 간의 싸움을 말리는 정도의 아저씨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건설해본 적이 있는 불란서는 1881년부터 20여년 동안 Panama 운하를건설하기 위하여 엄청난 투자를 하였는데 수많은 노동자 인명의 희생을 겪은 후에도 운하건설이 크게 진전 되지않자 결국 공사를 포기하기로 하고 1억 달러에 운하건설 공사권을 팔기로하였다.

수에즈 운하 보다는 훨씬 더 짧은 길이의 공사이었지만 지리, 자연여건이 수에즈 보다 훨씬 더 어려운 데다가 더 큰 문제는 모기를 매체로한 황열병으로 2만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해서 공사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미국은 1849년의 California gold rush 때 미국동부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돛단배로 가려면 위험한 항해로 몇 달씩 걸리던 어려움을 이미 경험하였고 , 아시아 쪽으로의 진출이 시작되면서 운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양대양을 끼고 있는 미국은 Panama 가 길목을 막고 있어서 양 대양간에 미국 해군함정들이 긴급하게 왕래할 수가 없어서 두 배의 함대를 유지해야만 했다.

Teddy 는 미국이 Panama 운하를 건설하고 미국이 운하를 직접 운영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국회가 찬반논쟁으로 끝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 Teddy 는 운하건설쪽 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미 Cuba 에서 모기의 박멸로 황열병을 퇴치시켰던 경험이 있는 미국은 1902년에 4천만 달러 주고 불란서로부터 공사권을 구입하였다.


미국은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Colombia 로부터 Panama 주의 운하공사 지역을 장기적으로 임대 받아야 했었다. 미국은 임차를 위해 천만 달러를 내고 매년 25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제안했는데 1903년초에 Colombia 상원이 임차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였다.
Colombia 는 미국은 2천만 달러를 내고 불란서도 천만 달러를 내야만 한다고 요구하였다. 운하건설을 시작도 하기 전에 난관에 봉착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에게 천행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Panama 주에서 독립혁명이 일어났는데 미국 해병대가 혁명을 진압하려고 출동한 Colombia 군의 진로를 막아버려서 Panama 가 손쉽게 독립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Panama 의 이 독립이 미국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Panama 의 새 독립정부는 미국의 Panama 운하 지역의 임차조약을 해주었다.

Panama 운하공사는1904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사는 황열병 때문에 1905년에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모기박멸 사업을 먼저 시작하여 황열병 근절에 성공하였다. 그때 이후로 황열병은 전 세계에서 거의 다 근절되었다고 한다.

1906년에 공사가 재개되었고 총계 5억 달러가 투자된 후 태평양쪽의 수위가 대서양쪽 보다 27 미터가 더 높고 길이가 48 마일이 되는 Panama 운하가 8년만인1914년에 개통되었다. 운하가 본격적으로 쓰여지면서 미국이 얻은 이익은 돈만으로서는 다 계산해 낼수 없는 것이었다.

Panama 땅을 치욕적으로 빼았긴 Colombia 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 을 느낀 미국은 Woodrow Wilson 대통령때에 Colombia 에게 2,50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혹시 Colombia 에게 미국이 상처를 주었다면 “심심한 유감 (sincere regret)” 을 표시한다는 위로격의 조약 을 제안하자 Theodore Roosevelt 전대통령은 “무신 소리여! 그런 조약은 미국의 명예를 훼손하는 범죄이다” 라고 펄펄 뛰었고 미국 상원은 두 번이나 이 조약의 비준을 거부 하였다.

결국 Teddy 가 사망한 후 1921년 3월에야 (sincere regret) 라는 표현을 삭제한 채 조약이 비준되었다. Panama 운하의 소유권은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었던 1977년에 서명한 조약에 따라 1999년에야 Panama 국으로 이양되었다. Panama 운하의 소유권 때문에 미국과 Panama간에 계속 마찰이 있어 왔는데 소유권 이양 이후에 Panama 가 운영을 잘 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Panama 는 국고수입의 상당부분을 운하수입으로 충당해 오고 있다.

Panama 운하 만으로는 해양운송을 앞으로 다 감당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근래에 조선되는 초대형 선박들이 너무 커서 Panama 운하를 이용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추세에 따라 Nicaragua 는 2014년부터 Nicaragua 운하를 건설중으로 2019년에 개통될 예정이라고 한다.

Taft-Katsura Memorandum 이란 미일간에 영어본과 일본어본으로 1905년에 작성된 외교문서가 있다. 한 미국역사 학자가 외교문서들을 들춰보다가 발견하여 외교문서를 20년후에 공개한다는 원칙에 따라 국무장관의 허가를 받아서 1924년에야 외부에 알려진 이 외교문서는 미국측에서는 미국의 Taft 전쟁부장관이 필리핀에 가던중 일본을 방문하여 Katsura 일본수상과 대화를한 기록으로 서명도 없는 대화록에 불과하다고 애써 그 문서에 중요성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이지만 한국사람들은 이 문서가 밀약-으로써 한국의 국운에 못을 박은 정도의 비중있는 외교문서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비록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반대가 없이 사후 양해가 있었다는 문서이었지만 국무장관이 가서 협상을 했던 것도 아니고 양국이 서명한 것도 아닌 대화에 불과했다는 것이 미국측의 구차한 변명이지만, 이 문서가 우리나라에 미친 역사적 결과로 볼 때에는 명칭이야 무엇이었던ㅍ간에 우리는 미일간의 비밀외교협상 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조태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