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라인강 크루즈 관광기⑥

2016-10-21 (금) 권태진/ 빛과 사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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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맨틱한 하이델베르크 시가지 ‘한폭의 그림’

라인강 크루즈 관광기⑥

하이델베르크 - 석양의 시내 전경

18세기 낭만주위 발상지 하이델베르크
독일인들이 가장 권하는 도시 1위
독일의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 '스페여'
프로테스탄트 용어 처음 나온 곳

■로렐라이 (Lorelei) 언덕
배는 Braubach로 이동하여 우리들을 기다기고 있었다. 배는 오전11시45분 Braubach를 떠나 루데샤임(Rudesheim)으로 향했다. 라인계곡(Rhine Gorge) 항행이다. Koblenz에서 Rudesheim까지 라인계곡 76km는 라인강의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오후 1시가 되어 프로그램 디렉터가 갑판 위에서 강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항행 중 경관을 설명하는 곳은 이 지역뿐이다.

라인계곡은 도시나 큰 마을이 없어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의 모습들이다. 배가 계곡으로 들어온 지 30여분 지나 로렐라이 언덕이 있는 계곡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라인강에서 가장 좁고 가장 깊은 곳으로 물속도도 가장 빠른 곳이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는 주의를 요하는 지점이다.


프로그램 디렉터는 로렐라이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설의 이야기는 금 팔찌를 한 이 절세 미모의 여인 로렐라이는 이 바위 위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곤 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변한 남자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로렐라이는 절벽에서 강으로 투신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그녀의 영혼은 살아 그 뛰어내린 바위에 나타났다고 한다. 아름다운 머리를 빗으면서 달콤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변절한 남자를 복수하기 위해 아직도 그 바위에 나타나 노래를 부른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전설은 이곳을 지나가는 선원들이 그녀를 쳐다보다가 넋에 빠져 배가 파손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사고가 나는 것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그녀의 긴 금발 머리 때문이다. 그녀가 강 언덕에서 옷을 벗고 햇볕에 몸을 태우고 있는 것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선원들이 들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노래의 멜로디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라인강 전설에 아직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설의 여인 로렐라이는 1801년 독일작가 Clements Brentno의 글에 등장한 인물이다. 로렐라이 상은 강에서 180m 높은 언덕 위 돌출부에 놓여 있다. 하체까지 덮는 긴 머리 아름다운 나체상은 1982년 소련조각가가 무료로 제공한 것이다.

경치를 즐기다가 보니 다음 기착지인 Rudesheim에 도착했다. 5시간 항행 오후 5시였다. 이 도시의 인구는 1만 명 정도로 라인강 주위의 와인생산 중심지의 하나이다. 라인강 변에서 가장 오래된 성인 Bromserburg 성이 이곳에 있다. 1000년에 지어진 이 성은 라인강을 내려다보는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대부분의 성들과 달리 강변에 세워졌다. 현재 와인 박물관이 이곳에 있다. 오후 5시15분에 하선하여 안내자를 따라 이 도시를 거닐 수 있었다.

이곳에서 옵션으로 이 지역 식당을 찾아 이곳 특유의 포도주를 맛보는 기회가 있지만 택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배에서 유리로 여러 가지 공예품을 만드는 쇼가 있었다. 이 지역 주민들이 벌이는 쇼에서 유리로 만든 칼라 목걸이 2개를 아내를 위해 샀다. 얼마 전 뉴욕에서 어느 모임에 갈 때 아내가 하나를 목에 걸고 나왔다. 한개 5달러 짜리였지만 특색이 있다고 아내는 말했다.

제 5일 5월4일 (수)
■웜스 (Worms), 말틴 루터와 Worms
새벽 1시에 배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자는 동안 계속 항행하여 아침 9시에 Worms에 도착했다. 이곳에 정박하고 다음 육지 여행지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로 가기 위하여다. Worms는 관광일정에 들어 있지 않아 아쉬웠다. 도시의 인구는 8만2,000여 명으로 큰 도시는 아니다. BC 14 이전에 설립된 고도로 11세기에서 1789년까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시 (imperial city)였다. 이곳에서 여러 차례 제국의 의회가 개최된 곳이다. 1521년에 개최한 the Diet of Worms는 종교역사상 중요한 회의다.


마틴 루터는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에 항의하여 95개의 항의문을 발표한 후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때 찰스 5세 황제는 루터의 항의문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Worms에 의회를 소집하고 루터의 참석을 요청했다. 루터가 참석 후 무사히 의회를 떠날 수 있도록 합의를 본 후 루터가 참석했다. 교회와 교황은 루터가 자기주장을 철회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루터는 자기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그의 변론이 끝나고 루터는 약속대로 그곳을 떠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루터의 신변이 위협을 알게 된 헨드릭 왕자가 루터가 집으로 가고 있는 도중 그를 Warburg Castle로 도피시켰다.

이 회의에서 웜스칙령이 발표되었다. 루터를 이단자로 규정지은 칙령으로 그의 신학이나 그를 돕는 자는 처벌하도록 한 것이다. 성에서 숨어있는 동안 루터는 신약성경을 라틴어에서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하는 큰 작업을 했다. 이 성은 Worms에서 남쪽 214km에 떨어져있는 아이제나흐(Eisenach)에 위치하고 있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지로 지정된 이 성에 관광객이 많이 오는 것은 루터와 관련하여 개신교 성지로도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Heidelberg)
하이델베르크는 라인 Worms에서 약 40km 떨어진 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오전 9시15분 버스에 분승하여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가까이였다. 하이델베르크 시 자체는 16만 명의 인구에 불과하나 주위의 두 개의 도시와 주변 여러 타운들을 포함한 메트로에 24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독일의 제2도시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서 열차로 40분 거리다.

하이델베르크는 18세가 말 태동된 감정과 개인주의를 강조한 예술, 문학, 믐악 과 지성 운동인 낭만주의(Romanticism)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그 주위 네카강 (Neckar River) 삼각지에 수십만 년 전에 인간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이 주위에서 발견되었다. BC 5세기에 셀 족의 군사보루와 예배처가 이곳에 세워졌으며 AD40년에는 로마군대가 주둔했다.

하이델베르크는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시 풍경 때문에 인기 있는 관광지의 하나이다. 매년 수백만 명이 이 도시를 찾는다. 바로크양식의 아름다운 Old Town, 독일의 가장 오래된 대학과 유명한 성이 이곳에 있다. 라인강으로 흘러가는 Neckar 강이 시내를 흐르고 강 양쪽에 도시가 형성되어있다. 도시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2차 대전당시 미군들이 고의적으로 폭격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독일 사람에게 독일에서 가장 가도록 권하고 싶은 도시를 물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던 일이 있다.

■하이델베르크 성 ( Heidelberg Castle)
하이델베르크 시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간 곳이 하이델베르크성이다. 버스에서 내려 300피트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성으로 갔다. 우리 그룹의 안내를 맡은 사람은 미국 미시건 주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훤칠한 키에 미남형인 그는 현재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로맨틱한 도시로 알려진 곳이다. 몇 시간 밖에 머물지 않은 주제에 감히 어떻게 로맨틱함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에서 내려다보는 시의 관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시 중앙에 흐르는 Neckar강이 양편에 붉은 기와지붕으로 된 나지막한 집들과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고층건물은 시내 중심에 하나도 없으며 높아야 3-4층의 건물들 뿐이다.

하이델베르크 성이 건축된 연도는 정확치 않다. 그러나 1214년 전에 첫 건축되었으며 1294년에 확장되었다. 바로크와 르네상스의 양식으로 된 이 성은 라인의 영주들, 후에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왕자들이 있었던 궁전이다. 한때 이 성의 주인이었던 루프레크트(Ruprecht)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전쟁으로 파괴되어 부분적으로 복구하였으나 파괴된 잔재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궁 안에 있는 포도주 저장통 규모를 보고 놀랐다. 1751년에 만들어진 저장통은 넓이가 8.5미터 높이 7미터로 58,000 갤론이 들어가는 거대한 술통이다. 250여 년 전부터 사용되지 않고 있다.

■하이델베르크대학(Heidelberg University)
안내원을 따라 올드타운으로 들어갔다. 올드타운에 하이델베르크대학 본부가 있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캠퍼스가 올드타운에 있다. 올드타운캠퍼스 건물들은 한곳에 없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미국대학캠퍼스 같은 분위기는 없었다. 그러나 자연과학 및 의과대학 과 대학병원이 있는 뉴캠퍼스는 시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다. 독일에서 자연과학과 생명과학 캠퍼스로는 독일의 최대의 캠퍼스다. 학생들의 기숙사, 운동시설, 연구소, 병원 등이 모두 이곳에 있다.

1386년에 건립된 이 대학은 독일 최초의 대학이다. 여러 차례 독일최고의 대학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노벨상을 받은 등급으로도 독일에서 최고의 대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동문과 교수 는 56명이나 된다. 현제까지 국내외에 11명의 동문 국가원수를 배출했다.

현재 교직원은 500여명의 정 교수를 포함 교원 6,000여명 기타직원 7,000여명 총 13,000여명이다. 학생은 학부 15,300명, 대학원 12,000명 박사학위 과정 3,000명 총 3만 명 이상이다. 100여개 이상의 과목이 있다. 세계 130개 국가에서 온 학생들이 등록하고 있으며 매년 1,000명 이상의 박사를 배출하고 있다. 공립학교로 학비는 거의 없다. 유학생들이 유럽을 선호하는 이유 중에는 미국보다 학비가 훨씬 저렴하며 박사학위 취득도 미국보다 쉽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성과 올드타운을 관광한 후 주어진 자유시간이 몇 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한번 와 보고 싶었던 곳을 불과 몇 시간을 보내고 크루즈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어 아쉬움을 남기고 하이델베르크를 떠났다.

■신교(Protestantism,프로테스탄트이즘)의 용어
우리가 관광을 하는 동안 배는 Worms에서 출발 스페여(Speyer)로 이동하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오후 3시였다. 오후 5시 Speyer 관광이 시작되었다. 시내까지 걸어서 얼마 되지 않았다. 인구 5만명의 이 도시는 로마인들에 의하여 설립된 도시로 독일의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다. BC10년에 로마군대의 군사기지가 이곳에 있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황제성당인 유명한 스페여 대성당 내부를 관람했다. 성당은 1030년 콘라드 II 황제가 건립을 시작했으며 8명의 로마황제들이 묻힌 곳이다.

배로 각자 돌아오기까지 1시간의 자유시간이 있었다. 아내와 나는 로마황제 멕시밀란 거리를 걸으면서 도로 양편의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지나갔다. 구교 가톨릭교와 대조적으로 신교 “프로테스탄트”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곳도 스페여이었다. Worms 의회가 마틴 루터를 이단자로 규정한 후 1529년 Speyer 의회가 개최되었다. 이때는 황제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는 소위 14개의 자유시와 6명의 루터란 왕자들이 루터에 대한 결정을 항의했던 해였다. 루터를 지지하는 루터란 주들은 Speyer에서 회의를 열고 루터에 대한 결정을 항의(protestation)하여 개신교인 프로테스탄트 이즘이란 표현이 처음으로 이 회의에서 나왔다.

7시에 시작한 이날의 저녁은 뷔페 형식이었다. 그러나 소시지 등 독일의 전통적인 음식이 추가로 등장했다. 나는 소시지를 좋아하지 않지만 독일음식의 대표적인 것이라 먹어보니 맛이 좋았다. 저녁 9시에는 라운지에서 오락시간과 댄스의 모임이 있어 아내와 함께 가 보았다. 사교춤 솜씨가 제로에 가까운 우리부부에게는 춤을 추러 간 것이 아니라 춤추는 것을 구경하기위해 간 것이다. 춤을 추는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았다. 유람선을 타는 사람들 중에는 화려한 옷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춤옷까지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옷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것은 여행에 불편만 준다. 그리고 춤을 출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때는 비교적 깨끗하게 차리고 나오지만 화려하게 복장을 한 사람은 없었다. 춤추는 사람들 중에는 진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화려한 차림은 여기서는 도리어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저녁식사를 즐기는 시간 배는 유서 깊은 프랑스 강변도시 스트라스보그(Strasbourg)로 향하고 있었다. <계속>

<권태진/ 빛과 사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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