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의 에너지 획득 방식이 공동체 가치관 변화 불러와
▶ 위계 중시했던 농경시대 거쳐 화석연료 시대를 사는 현대인
■가치관의 탄생 <이언 모리스 지음, 반니 >
“시대의 필요가 가치관을 정한다.” 확고한 가치관이 문명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필요가 인류의 가치관을 결정해 왔다는 인류문명사의 대가 이언 모리스의 주장은 적잖이 충격적이다. 마치 독실한 종교인 집안에서 성장한 사람이 무신론자를 만나 ‘신’은 인간들이 시대나 심리적 필요에 의해 고안해 만들어 낸 존재라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말이다.
휘둥그레진 독자들에게 저자는 경제학자 존 케인스의 일화도 들려준다. 어느 날 일관성 없다는 비판을 받은 케인스는 이렇게 답한다. “사실이 바뀌면 나는 의견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나요?” 상황이 달라지면 신념을 바꿀 수 있고 사실에 적응하기 위해 생각을 고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대사와 고고학을 전공해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지난 200년 동안 인류가 풀지 못한 문제’ 같은 화제작을 비롯해 ‘문명의 척도’ ‘전쟁의 역설’을 집필하는 등 이 분야 최고의 석학으로 꼽힌다. 그는 약 10만년 전쯤 인간 공통의 핵심가치 몇 가지가 출현했다고 본다. 공평이나 공정, 사랑과 증오, 위해 방지, 신성한 것에 대한 합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가치에 대한 해석, 즉 가치관은 문화의 영역이다.
저자는 기술 혁신과 지리적 여건을 주요 요소로 봤고 각 문명의 에너지 획득 방식이 그에 속한 인간 가치관의 변화를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분류한 인류문화는 수렵채집·농경·화석연료 시대의 3단계로 나뉜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경제형태인 수렵채집의 사회를 보자. 야생의 동식물을 먹고 사는 수렵채집인은 변화의 폭이 좁고 단출한 사회 체제로, 위계보다 평등을 중시하지만 폭력에는 상당히 너그럽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농경 가치관’은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길러서 생활하는 사회와 결부된다. 농경민은 평등보다 위계를 중시하고, 폭력에는 덜 관대한 편이라고 저자는 분석했다. 반면 세 번째 가치 체계에 해당하는 ‘화석연료 가치관’은 석탄·천연가스·석유의 형태로 화석화 된 죽은 식물의 에너지를 추출해서 살아있는 동식물을 위한 에너지로 바꿔 사용하는 사회와 결부되는 가치관이다. 화석연료 이용자는 불평등함 속에서 살고 있지만 위계보다는 평등을 지향하며 폭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도 속해있는 이 ‘화석연료 시대’의 다른 이름은 ‘산업시대’ 또는 ‘자본주의 시대’, 바로 ‘현대’다.
주장과 더불어 저자는 자신의 이론이 유물론인 동시에 진화론이며 보편주의와 기능주의를 표방하고 도식성의 우려도 있다는 점을 먼저 털어놓는다. 게다가 책은 저자의 이론과 이에 대한 4개의 논평, 이에 대한 저자의 반론으로 구성됐다. 논평도 흥미진진하다. 저자 모리스의 역사 진전에 대한 견해가 지배층의 이념에 가깝다며 가치관과 문화 유형의 다양성을 축소한다는 지적이 있는가 하면, 사회에 실제로 퍼져 있는 가치와 사람들이 마땅히 보유해야 할 참된 가치를 구분해야 한다며 모리스가 도덕가치를 보는 방식의 적절성을 논박하기도 한다.
‘만고불변의 가치관’을 뒤흔들어 놓기는 했으나 어쨌건 “문화적 진화가 결국은 최선의 결과를 낼 것”이라는 데서 새로운 시대의 희망과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