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처형위기 유대인 수천명 구한 ‘소년영웅’ 빛 보다

2016-10-14 (금) 뉴욕타임스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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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이 쓴 책 ‘아돌포 카민스키: 위조범의 생애’ 출간으로 뒤늦게 알려져 화제

▶ 나치 점령 하의 파리서 비밀 위조여권 만든 총책

처형위기 유대인 수천명 구한 ‘소년영웅’ 빛 보다

2014년 암실에서 작업 중인 아돌포 카민스키. 2차 세계대전 중 틴에이저였던 그는 수천명의 프랑스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다. <사진 Raphael Zubler>

1944년 나치 점령기의 파리.

레프트뱅크 아파트 건물 꼭대기의 좁은 방에서 하루 종일 네명의 젊은이가 들어박혀 일하고 있다. 이웃사람들은 그들이 화가인줄 안다. 그 방에서 풍겨 나오는 화학약품 냄새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유대인 레지스탕스 그룹의 일원들, 곧 수용소로 추방될 위기에 놓인 아이들과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비밀리에 위조여권을 만들고 있다.


이 비밀 조직의 기술책임자는 가장 나이가 어린 18세 소년 아돌포 카민스키, 그는 19세 생일을 맞기도 전에 수천명의 생명을 구했다. 유대인들이 나치의 검거를 피해 숨거나 무사히 국외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서류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국가적 위기로 사선에 놓인 여러 나라들의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위조서류를 만들어주었다.

현재 91세인 카민스키는 오래전 그가 일했던 연구실에서 멀지않은 곳의 서민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걸어다니는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이다.

2차 대전의 영웅 가운데 한사람이지만 이웃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한 일을 비밀에 붙여왔기 때문에 가족들조차 그의 과거 행적을 잘 알지 못했다.

가난한 유대인 틴에이저 소년이 자기 목숨 부지도 힘든 전쟁 중에 왜 남들을 돕는 위험한 일에 자원하고 나섰을까? 그의 딸 사라 카민스키는 아버지에 관해 쓴 책 ‘아돌포 카민스키: 위조범의 생애’(Adolfo Kaminsky: A Forger’s Life)를 집필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이야기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영어 번역판은 지난 주 미국에서 출간됐다.

아돌포 카민스키가 한 일은 돈을 위해서도, 영예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위조서류를 만들어준 댓가로 단 한 번도 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하고 있다는 분명한 모티브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주 솜씨 좋은 위조전문가였지만 그로 인해 기쁨과 영광을 누린 적은 거의 없다. 언제나 가난했기 때문에 상업사진 일을 하면서 간신히 연명해왔다. 전쟁 중에 너무 많은 일을 한 탓에 그의 시력은 크게 손상됐고 결국 한쪽 눈은 영구 실명했다.

“아주 작은 실수로도 누군가를 감옥이나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나게 무거운 책임감으로 나를 짓눌러서 단 한번도 즐겁게 여긴 적이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 생각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카민스키가 난민들에 대해 연민을 갖게 된 이유는 그 자신이 난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유대계 부모 사이에서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으며, 러시아에서 파리로 도망쳤으나 프랑스에서도 추방당했다. 카민스키 가족은 아르헨티나 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7세때 프랑스로 돌아와 친척친지들과 재결합 할 수 있었다.

“‘서류’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처음 알게 된 것이 바로 그때였다”고 아돌포는 회상한다.

13세때 가계를 돕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그가 들어간 곳이 드라이클리너 세탁소의 전신인 직물염색업체였다. 그곳에서 그는 얼룩을 어떻게 지우는지를 배웠고 집에 와서도 화학교재를 펴놓고 공부하면서 실험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때 보스가 화학공학기술자여서 궁금해 하는 것은 모두 자세히 일러주었다”고 말한 그는 주말이면 인근 농장에서도 화학기사를 도우며 일해 버터를 얻어오곤 했다.

1943년 여름 그의 가족은 나치에 체포돼 드랑시로 보내졌다. 파리 인근에서 검거된 유대인들이 죽음의 캠프로 보내지기 전 들르는 마지막 수용소였다. 이번에도 여권이 그들을 구출해냈다. 다른 유대인들은 즉시 죽음의 캠프로 보내졌지만 카민스키 가족은 그곳에서 석달을 머물렀는데 그 이유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그들의 구금에 대해 항의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용소에서 그에게 수학을 가르쳐주었던 한 교수를 카민스키는 잊지 못한다. 어느 날 클래스에 가보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곧 죽을 처형자 리스트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그는 끝까지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카민스키 가족은 풀려났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파리도 안전하지 않았고, 아르헨티나 국적의 사람들도 추방당하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아돌포의 아버지는 유대인 레지스탕스 그룹으로부터 가까 서류를 얻어냈고 그걸 가져오라고 아돌포를 보냈다. 거기서 아돌포는 한 요원으로부터 서류에서 푸른색 잉크를 지우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농장에서 얻은 지식으로 젖산을 사용해보라고 조언했다. 그 방법이 효과를 보자 그는 당장에 레지스탕스 그룹의 일원으로 영입됐다.

카민스키가 속한 그룹은 수많은 레지스탕스 그룹의 하나였다. 이 그룹은 누가 체포될 지를 미리 알아내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해당 가족들에게 이를 알려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 드랑시로 보내질 아이들과 같은 가장 긴급한 케이스를 돕고 있었다. 구해낸 아이들을 교외의 평범한 가정들이나 수녀원으로 보내거나 스위스나 스페인 같은 곳으로 밀입국 시켰다. 어느 때는 밀려드는 긴급 요청으로 이틀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다.

“단순한 계산이에요. 내가 한시간에 30개의 서류를 만들 수 있으니, 한시간을 자면 30명이 죽게 되는 겁니다”역사가들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암약하던 유대인 레지스탕스 그룹들이 7,000명에서 1만명의 아이들을 구했다. 그러나 1만1,400명의 아이들은 추방됐거나 살해됐다.

전쟁이 끝난 후 카민스키는 더 이상 서류위조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함께 일했던 네트웍으로부터 다른 일들이 계속 연결됐다. 결과적으로 그 후에도 30년 넘게 일하면서 알제리아 독립운동,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백 인종차별 투쟁, 월남전 징집을 피하려는 미국인 병역기피자들의 서류까지 모두 만들어주었다. 1967년 한 해에만 15개국 사람들을 위해 서류 위조작업을 했다는 것이 그의 추산이다.

그는 2차대전이 끝난 후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혼했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가 지하에서 하는 일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아버지가 왜 자주 찾아오지 않는지 몰라서 늘 그를 원망했고, 그가 사귀었던 여자들도 바람을 피운다고 오해하곤 했다.

“모든 인간은 태생과 신앙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동등하다. 우월한 자도 열등한 자도 없다”는 신념에 따라 위조작업을 계속해왔다는 그는 1971년 이 일을 그만 두었다. 너무 많은 단체들이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일을 계속하면 체포돼 수감될 가능성이 높아졌던 때문이다. 이후 카민스키는 사진을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오래 전 알제리를 방문했을 때 만난 젋은 법학도 여성과 결혼한 그는 그녀와의 사이에 세 자녀를 두고 있다.

<뉴욕타임스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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