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23) McKinley 대통령(25대)의 당선과 국제무역에 끼어드는 미국

2016-09-23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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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불황을 타개하는 열쇠가 화폐정책이라고 생각하는 미국민들, 그중에서도 특히 농산업자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189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쟁점은 또 다시 화폐제도이었고 논쟁은 여전히 “금본위”이냐 “Free Silver”이냐 이었다.

민주당은 금본위를 지지할 것인지 “free Silver 를 지지할 것인지에 대해 당론이 결정되지 않은 채로 대통령 공천대회를 열었다. 확성기 시설도 없고 냉방시설도 없었던 때인 1896년 7월에 열린 민주당 대통령후보 공천대회장에서 대부분의 대의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별로 재미도 없는 연속적인 후보자들의 연설을 듣는둥 마는둥 절반은 졸고들 있었다.

이날 마지막 연사로 등단한 William Jennings Bryan 하원의원이 카랑카랑하나 아주 듣기좋은 그 특유의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하자 모든 대의원들이 졸다가 그의 목소리에 잠들을 깨우고 경청하게 되었다.


그는 네브라스카 출신으로 연방하원의원을 두 번 밖에 지내지 않았고 대통령 최소연령 제한을 겨우 한살 넘긴 36세인 전국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이었으나 당내에서 농산업자들의 이익을 위해 가장 열심히 노력해온 사람이었다. 그는 부자들이나 집안이 좋은 사람들을 자주 비난하였으므로 부자들의 후원은 별로 받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네브라스카의 소도시들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연방하원의원 이된 Bryan 은 청중을 사로잡는 타고난 말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날도 절반들 자다가 Bryan 의 우렁찬 목소리에 깨어난 대의원들은 곧 그의 사람을 사로잡는 연설에 휘어잡혀서 연설이 끝날 때까지 박수들을 치고 환호를 해가며 그에게 매료 되었다. 그는 네브라스카에서 여러 번 해오던 “Free Silver”제도에 대해서 똑같은 연설을 그날도 했었으므로 거침없이 연설을 했고 대의원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그는 말재주가 하도 좋아서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그가 연설을 하면 쉽게 들렸다고 하고 연설이 끝나면 Bryan 은 항상 하나님편이고 정적은 항상 Satan 편이라는 인상을 청중들에게 주는 재주가 있었다. 그다음날의 투표에서 그는 대통령후보로 쉽게 선출되었다. 그 얼마 후에 공천대회를 가진 Populist당도 Bryan 을 자당의 대통령후보로 공동 공천하였다.

공화당은 오랜동안 중진 연방하원의원으로 일한 후 오하이오 주지사로 있던 William McKinley 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그는 하원에서 금본위제도와 고율의 수입관세를 주장해오던 사람이었다.

1896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양당 후보는 완전히 대조적인 선거운동을 하였으며 McKinley 쪽은 터무니없는 흑색선전을 했었다. 더 젊고 웅변도 잘했던 Bryan 은 기차를 타고 전국의 대소도시를 방문하며 밤 늦게까지 선거유세를 다녔고 어느 일요일에는 36번이나 연설을 한 적도 있었다. 공화당의 보수적인 McKinley 후보는 거의 선거유세를 다니지 않고 자기 집 앞마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짤막한 연설 몇 마디를 하였었다.

그 몇 마디 중에 자기는 금본위제도를 의미하는 “건실한 화폐” (sound money) 를 지지하며 화폐에 대한 신뢰의 회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정도의 말만 하였다고 한다.

McKinley 가 공화당 대통령후보가 되도록 막후 조종을 한 사람은 오하이오의 기업인이자 정치보스이었던 Mark Hanna 이었는데 그는 정략가로써 McKinley 의 선거사무장을 맡았다. 그는McKinley 가 연설로서는 Bryan 을 당할 수 없는 것을 알고 Bryan 의 강점을 역이용하기로 하였다. 그는 연설을 잘하고 말이 많은 Bryan 이 결국은 자기의 말재주에 발목이 잡혀서 역효과가 날 수 있음을 기대하였고 각종의 헛소문으로 Bryan 을 곤경에 빠트렸다.

그는 만일 ”과격분자”인 Bryan 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금본위대신 무절제한 Free Silver 정책으로 은화를 남발하여 화폐의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소문을 내고 기업주들에게는 결국 공장을 닫게 될 것이라 말하고 노동자들에게는 모두 실직하게 될 것이라고 헛소문을 내었다.


Bryan 을 지지했던 농산업인구보다 숫자가 더 많은 공장노동자들과 도시인들에게 Hanna 의 계략은 제대로 먹혀들어가서 공화당은 계속 상하 양원의 다수당이 되었고 Bryan 은60여 만 표의 차이로 패배하고 말았다. 자금력과 조직력도 미약하였고 민주당 내의 금본위 지지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Bryan 은 650만 표를 얻는 선전을 하였고 만일 1만9천 표만 여섯 개의 주에서 Bryan 에게 투표해 주었다면 그가 당선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Bryan 이 비농산 주들을 한 군데도 이기지 못한 것이 그가 낙선된 주 이유였다. Bryan 의 낙선에도 불구하고 그의 득표 능력에 크게 고무되었던 민주당은 그를 다시 1900년과 1908년에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으나 두 번 다 낙선되고 말았다.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까지 동쪽에 대서양, 서쪽에 태평양을 두고 지리적 으로 격리되고 보호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물자를 최소한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끝난후에 미국민들은 큰 땅덩어리를 채우고 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백 만 명의 새 이민들이 필요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미국의 농공산업자들도 세계 도처에 있는 고객들에게 물자를 수출해야만 되는것을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경제규모가 커지고 활발해짐에 따라 미국의 소비자들과 공산업자들은 이탈리아와 중국에서 비단을, Ceylon 과 Sumatra 에서 고무를, 브라질에서 커피를, Malay 반도에서 주석을, Rhodesia 에서 황연 등 대양 건너에 있는 나라들에서 수 천 가지의 물자들을 수입해야만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식 산업혁명으로 미국은 새로운 물건들을 생산하고 새로운 방법들을 시행하는 새 기술의 나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각국은 경쟁적으로 미국의 새 기술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미국도 세계가 ‘새 세계’ 가 되기를 원했다.

189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미국은 정부가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민주주의 제도 를 실험하고 실천하는 나라가 되었고 인근지역 쿠바가 스페인의 폭정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쿠바를 해방시키려고 하였다.

쿠바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새 정부까지도 미국이 만들어서 주어야 한다는 식의 발상이었는데, 쿠바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 무렵 유럽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몰두되어 있어서 걸핏하면 전쟁을 하고 있었던 때인지라 미국은 그 경쟁에 뛰어들 수도 아닐 수도 없는 미묘한 국제정세를 당면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높은 언덕 위에 우뚝 세워진 흰 등대같은 평화적이고 모범적인 나라가 되어보겠다던 미국의 건국이념이 국제정세에 휘말려 오염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는 지를 시험하게 되는 시대에 미국은 들어가고 있었다.

1800년대 초부터 미국의 무역상, 포경선, 기독교선교사, 외교관 등이 아시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유럽의 강국들이 해외무역을 키워 나가거나 외국을 점령하고 영토확장을 해나가는 것을 보고 미국도 국제경쟁에 더 늦기 전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미 1785년 부터 미국의 무역상은 중국 Canton 을 왕래하며 무역을 하고 있었다. 영국이 1839년과 1842년의 아편전쟁에서 승리하자 영국은 중국에서 특권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제10대 John Tyler 대통령은 Caleb Cushing 특사를 중국에 보내어 미국도 영국과 동등한 무역특권을 얻을 수 있도록 교섭을 하여서 1844년에 Wanghia 조약으로 미국도 최혜국 우대특권으로 중국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되었다.

이 조약으로 Canton 외에 네 개의 항구가 미국에게 개항되었다. 미국의 무역선들이 필리핀을 왕래하기 시작하였고 자바, 인도 등의 나라와도 무역이 시작되었으며 1833년 에는 Siam 과도 상업조약을 맺었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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