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라인강 크루즈 관광기① 네덜란드

2016-09-16 (금) 권태진/빛과사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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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에 상처입은 소녀의 애절한 통곡 있는 곳

라인강 크루즈 관광기①  네덜란드

앤 프랑크 박물관의 관객으로 줄 서 있는 곳에서 아르헨티나에서 온 연극배우와 함께

세계최대 꽃 정원의 하나인 튤립정원 퀴겐호프
암스테르담서 가장 많은 관광객 찾는 곳 '앤 프랑크 박물관'

금년 5월 아내와 라인강 크루즈 여행을 했다. 7박8일 동안 4개국 8개 지역에 배를 정박하고 관광하는 일정이다.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출발 스위스 바젤에서 끝나는 일정이다. 크루즈는 바젤에서 출발과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하는 두 노선이 있다. 라인강은 스위스 알프스에서 시작하여 암스테르담으로 와서 북해로 흘러들어간다. 그래서 우리가 택한 노선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노선이다. 네덜란드 관광을 위해 배에 오르기 3일전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네덜란드 (Netherlands)
화란이라고도 부르고 또 홀랜드라고도 불렀다. 화란은 한자 표기며 홀랜드는 네덜란드의 주 이름이며 나라가 아니다. 네덜란드는 운하의 나라, 풍차의 나라, 꽃의 나라라고 불린다. 그러나 육지가 바다보다 낮은 나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땅이 댐으로 막아져 있기 때문에 Amsterdam, Rotterdam 등 댐(dam) 단어가 붙어있다. 왕국이지만 왕의 지위는 상징적이며 민주공화국이다. 국토의 면적은 남북한의 5분의 1 되는 작은 땅으로 인구는 1,700만명 이상이 되어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다.


국가경제는 세계 17위 국민소득은 5만 달라가 넘어 세계 10위이다. 암스테르담이 수도로 시 인구는 90만 명에 가까우나 매트로 지역은 230만명 이상이 된다. 뉴욕시와 롱아일랜드는 한때 네덜란드 식민지였다. 1624년 맨해튼을 원주민으로부터 사들여 이곳에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s)를 세웠다. 그러나 뉴욕을 침범한 영국과의 1665-1667년 전쟁에서 패하여 뉴 네덜란드는 영국으로 넘어갔다. 아직까지 카리브해안 3곳의 섬이 네덜란드 땅이다.

■ 4월 28일 암스테르담 도착
아내와 나는 4월 27일 밤 8시 델타항공기로 케네디공항을 떠나 암스테르담공항에 다음날 28일 아침 9시 30분에 도착했다. 7시간 30분간 비행거리지만 그곳이 뉴욕보다 6시간 빨라 도착한 날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현지 한국인 관광안내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호텔에 체크인이 되지 않아 바로 관광에 들어갔다.

안내원이 운행하는 승용차는 헤이그로 향하였다. 헤이그로 가는 도중 세계최대의 꽃 정원의 하나인 튤립정원 퀴켄호프(Keukenhop)를 들렸다. 가는 도중 도로 양쪽에 형형색색의 꽃으로 벌판을 장식하고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튤립정원은 각종의 꽃으로 장식된 거대한 공원이었다. 이곳은 3월 중순에서 5월 중순 3개월만 개장하는 곳이다. 혼잡을 이룬 관광객 속에 묻혀서 2시간 가까이 보냈다. 네덜란드의 화초와 꽃의 수출은 세계전체 수출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이 나라의 농업은 고도로 기계화 되었으며 농산물의 수출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2위이다.

헤이그 시내로 들어가기 전 근교에 있는 스케에브닝헨(Scheveningen)바닷가로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4월 말인데도 날씨가 쌀쌀하고 바닷가는 바람이 강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 이곳에서 알려졌다고 하는 생선튀김을 맛있게 먹었다. 북해에서 잡은 생선으로 요리한 것이라고 한다.

바닷가를 잠시 거닌 후 안내원이 특별히 좋아하는 박물관으로 안내되었다.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은 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파노라마 메스닥 박물관 (Panorama Mesdag)이다. 네덜란드화가 Hendrik Willem Mesdag이 스케에브닝헨 바다를 그린 풍경화로 영상으로 확대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림이라기보다 시네마스코프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정자로 되어 사방을 돌며 그림에 담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북해바다가 확 열려 한눈에 들어온다. 한 폭의 그림에 실물 같은 넓은 바다가 보이고 높은 파도위에 떠있는 선박들, 비치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기마병들, 한 여류화가가 비치에서 파라솔 아래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도 있다. 바다 광경의 뒤편을 돌아보았다.

모래언덕 뒤에 있는 평화로운 어촌의 관경이 멀리 보인다. 그리고 더 멀리는 헤이그 시에 높이 솟아있는 교회 첨탑들 모습이 여기저기 희미하게 보인다. 가까이에는 해변의 식당과 호텔에서 여인들이 전통적인 의상을 입고 서비스하고 있는 모습이 있다. 그림이라기보다 실물을 보는 기분이라 한동안 이 모습에 도취되어 있었다.


박물관 서점에 들려 이 그림을 해설한 책을 구입하였다. 책 설명에 의하면 그림의 영상 전체가 1,660 평방미터이다. 높이가 14.5m와 길이 114.5m다. 메스닥이 북해바다의 파노라마 작품을 시작한 것은 1881년 다섯 명의 다른 화가들의 협조를 얻어 1886년에 완성했다. 1881년 8월 1일 파노라마 작품의 일부인 ‘Grande Panorama Maritime’이 처음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제일 먼저 찾은 사람 중의 한사람이 빈센트 고호였다. 이 그림을 본 고호의 논평을 들어본다. “이 그림의 유일한 단점은 바로 이 그림이 단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박물관에서 1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낸 후 헤이그 시내로 향했다. 네덜란드의 정치적 행정적 수도라 할 수 있는 헤이그는 60만명 정도의 도시인구이나 로테르담 시와 합한 매트로는 약 2백만 명의 인구다. 처음 도착한 곳이 평화궁이다. 미국 철강 왕 카네기가 150만 달러를 희사하여 1915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이곳에 국제사법재판소, 국제사법상설중재재판소, 헤이그 국제법아카데미가 상주하고 있다. 내부에는 외부인들이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여 주위만 돌아보았다. 평화궁 광장 대리석위에 세계 각국의 문자로 ‘평화’ 라는 문구가 적혀있으며 한글도 적혀 있었다.

1907년 세계만국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다. 고종황제는 한일합방을 규탄하기위하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밀사로 헤이그에 보냈다. 그러나 규탄하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이준은 호텔에서 사망했다. 할복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왔던 이준은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1세기 이상을 우리는 역사를 잘못 알고 있었다. 한국의 역사가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은 사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 4월 29일 금요일 앤 프랭크(Anne Frank) 박물관
헤이그지역 관광을 마치고 전날 오후 늦게 암스테르담 호텔에 체크인 했다. 이날 일정은 현지관광회사가 계획한 것을 변경했다. 앤 프랭크 박물관과 나치정권에 저항한 저항박물관 방문은 여행사의 여행계획에 있지 않았다. 안내원이 아침 9시에 호텔로 와 앤 프랑크 박물관으로 향했다. 아침 10시가 개관인데 9:30분에 도착하니 100여명 이상이 줄에 서있다.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 중의 하나다. 최소한 1시간 30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우리 관광안내원이 말했다.

아직 날씨가 싸늘하고 비가 오고 바람도 강하게 불어 1시간 반을 밖에서 기다린다는 것이 쉬울 것 같지 않았다. 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미술관 보다 이곳을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안내원과 아내는 고흐미술관으로 가고 3시간 후에 만나도록 약속을 했다. 추운 날씨라 인근 구멍가게에 들려 우산, 천으로 된 장갑, 그리고 핫 초콜릿 한잔을 사들고 돌아와 다시 내 줄에 끼어들었다. 내 앞에 있는 젊은 남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식당을 3개나 운영하는 연극배우다. 뒤에는 세 명의 20대초 예쁜 독일여성들이 주말여행 중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안나 프랑크 일기’로도 알려진 ‘어린소녀의 일기’ ‘앤 프랑크 일기’는 이집에서 쓴 것이다.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있던 당시 앤이 13살 되는 생일에 아버지가 선물로 사준 일기장을 받은 2일 후인 1942년 6월 14일에 일기가 시작되었다. 앤이 독일수용소로 끌러가기 전 1944년 8월 1일까지의 일기가 마지막이었다. 이 일기는 전쟁의 공포를 알리고 인간의 정신을 웅변적으로 알린 클래식 증언이다.

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으며 1차 대전 때 독일군 장교 출신이다. 앤의 할아버지는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였다. 아버지도 그곳에서 사업을 잘 하고 있었다. 앤의 아버지는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유태인으로서 신변의 위협 때문에 당시에 안전지역인 암스테르담으로 1933년에 이주했다. 그 다음해 앤이 4살 때인 1934년에 전 가족이 암스테르담으로 합류했다.

1942년 7월 5일에 앤의 언니 마고가 독일에 있는 나치 캠프에 출두하도록 소환장을 받았다. 다음 날인 6일 모든 식구가 아버지 회사 건물로 숨었다. 살던 집에 물건을 두고 도주한 것처럼 가장하고 가족 모두 함께 숨었다. 이들이 숨은 것을 공장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으며 4명의 사무실 직원들은 앤 가족의 은신을 도왔다.

2년 이상 숨어 있었던 곳은 운하를 끼고 있는 푸린센그레치 263번지로 사무실과 작은 공장들이 조밀하게 들어서 있는 지역이다. 암스테르담은 이태리의 베니스처럼 시내가 곳곳에 수로인 운하로 된 도시다. 1시간 이상 줄에서 기다린 후 입구에서 매매하는 입장권을 구입하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작은 4층 건물로 앤의 아버지가 잼 원료를 만들어 파는 공장과 사무실이 있었던 건물이다. 앤이 숨었던 곳은 이 건물에 붙어있는 회사의 창고로 사용하였던 부속건물이다. 다락방까지 합하여 4층으로 된 협소한 건물로 다른 건물들에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현재 본채 1층은 박물관 사무실과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시장을 돌아보고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본채 2층에서 앤이 숨었던 부속 건물로 통하도록 되어있다. 앤이 숨어있을 때는 부속 건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 벽을 모두 책장으로 만들었다. 책장 뒤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도록 개조되었다. 한 층의 규격은 넓이 6m 길이 8m를 넘지 않는 협소한 곳이다. 1층은 앤의 부모와 언니가 거처하는 곳이며 2층에 앤과 앤보다 2살 위인 남자아이 피터가 사용하였으며 3층은 안나 아버지의 사업의 동업자요 피터의 부모 헤르만 부부와 또 다른 유태인 남자와 같이 있던 곳이다.

식당과 화장실도 3층에 있으나 화장실에는 작은 변기 하나만 놓여있었다. 화장실을 사용할 때 물소리가 아래에서 일하는 공장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했다. 4층 다락방은 감자 등 음식을 쌓아두는 곳이다. 모든 창문은 커튼으로 닫혀 있어 다락방은 앤이 가끔 올라가 밖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앤의 은신처가 1944년 8월에 경찰에 보고되었다. 앤과 언니와 어머니는 함께 북독일의 한 나치 유태인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아버지는 폴란드로 끌려갔다. 수용소에서 어머니는 자기 음식을 딸들에게 주는 것이 예사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먼저 기아로 죽었으며 그 후 언니도 영양부족으로 죽었다. 수용소에는 각종의 병이 들끓었으며 사람들이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어갔다. 앤이 15세 때 독일 Bergen-Belsen 수용소에서 죽은 것은 발진 디프스 병이었다. 그가 죽은 날은 정확치 않다. 그러나 영국군이 이 수용소를 해방시키기 몇 달 전인 1945년 2월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앤의 일기는 회사 여직원이 간직하고 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앤의 아버지에게 전해졌다. 이 여직원은 글 내용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후에 “만일 내가 그 내용을 읽었다면 일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 살라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술회한다. 8명의 은신자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버지 Otto Frank가 유일한 사람이다. 앤의 아버지는 곧 앤의 일기를 처음 네덜란드어로 출판하고 피신해 있던 곳을 앤 박물관으로 보존했다.

나는 앤의 피신처를 보면서 그리고 전시관에 걸린 그의 사진과 인용어를 보면서 이 어린 아이의 통곡을 보는 것 같은 마음의 아픔을 느꼈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에 대하여는 거의 관심이 없는 지점에 달했다. 세상은 내가 없어도 굴러간다, 여하튼 나는 이 사건들을 변경시킬 수 있는 길이 없다. 공부에만 집중하며 결국 모든 일들이 잘 풀리기를 바라야겠다.” 1944년 2월 3일의 절망을 표현한 일기. “내가 글을 쓸 때는 나는 모든 나의 걱정을 없앨 수 있다” 1944년 4월 5일 글과 일기에 대한 그녀의 소견이다. 앤은 한편의 소설도 시작하여 쓰고 있었다. 소설가나 언론인이 되었으면 하는 꿈을 표현한 것도 그녀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유태인이던 유태인이 아니든 나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자유스럽게 까불어대는 것이 정말 필요한 단순한 어린소녀라는 것을 이해해주는 이가 있을가?” “태양은 빛나고 하늘은 짙게 푸르고, 멋진 미풍이 불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리워하고 있다. 진정으로 그리워하고 있다. 그 모든 것, 사람들과 대화, 자유, 친구 그리고 때때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이 모든 것들.” 2년 이상을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던 앤의 애절한 통곡이 엿보인다.<계속>

<권태진/빛과사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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