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15) 미국의 최고등‘수출품’ ② 미국산 순금제 신부들

2016-07-29 (금) 조태환
크게 작게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15) 미국의 최고등‘수출품’ ② 미국산 순금제 신부들

Jennie Jerome(사진 왼쪽)과 Consuelo Vanderbilt

1860년대에 뉴욕 브루클린에 레오나드 제롬(Leonard Jerome)이라는 금융투자가가 부인과 세 딸과 함께 살았다. 그는 투기성 투자를 성공적으로 잘 하여서 상당한 재산가이었으며 음악을 좋아하고 비교적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정치적인 야심도 조금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브루클린에 Academy of Music 을 설립하였다. 그는 바람끼가 있었던 사람이었던지 오페라가수를 따라 다녔고 혼외정사로 나중에 오페라가수가 된 딸까지 하나 두었던 사람이었다.

1867년에 주식투자가 실패하자 부인은 세 딸을 데리고 파리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1871년에 레오나드도 가족을 따라 파리로 옮겨왔다. 둘째딸 제니는 부친을 닮아 음악을 좋아하고 승마도 즐기고 글쓰기 재주도 있었으며 피아노도 사사를 받아서 아주 잘 쳤다고 한다.

제롬 일가는 1873년에 어느 휴양지로 휴가를 갔는데, 그곳에서 19세의 미녀 제니는 영국의 귀족총각 랜돌프 처칠 (Randolph Churchill) 을 만나서 3일 만에 약혼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 총각은 보통귀족이 아니었다. 영국에는 왕가와 거의 맞먹는다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친정인 스펜서가가 있고 스펜서가와 동격이라는 말보로(Marlborough) 가가 있는데 랜돌프는 말보로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제롬 집안 으로서는 상상도 못해 볼 귀족집안 이었다. 제니와 결혼하겠다는 랜돌프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 제7대 Duke 인 존 스펜서-처칠(John Spencer- Churchill) 이 레오나드 제롬 에 대해서 알아본 결과 깊이 알아볼수록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결혼을 완강히 반대하던 존은 아들의 주장을 끝내 꺾지 못하고 1874년에 결혼을 하게 했다. 타협 끝에 지참금은 25만 달러로 결정되었다.

이 제니 제롬의 결혼은 아주 초창기의 미.영간의 국제결혼이었다. 결혼한지 7개월 (8개월이라고도 함) 만에 20세의 제니가 잘못 넘어져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을 조산하였다고 했는데, 출생한 아기를 보고 거의 모든 사람이 조산이 아니고 만삭으로 낳은 아기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혼 전에 임신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제니는 남편집안의 위치때문이기도 하였겠지만 젊은나이 때부터 영국의 사교계에서 활발하였고 남편과 아들 윈스턴의 정계진출에도 막강한 공로가 있었다. 그녀는 사교계의 연줄로 남편을 도왔으며 남편의 선거 때에는 선거유세도 하고 다녔다. 랜돌프는 중요한 부서의 장관도 두어자리 지내고 하원의 보수당계의 지도자로서 활동한 적도 있었으나 저돌적인 성격으로 정치인으로서는 더 크지 못하였다.

그는 1886년에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갑자기 정치에서 손을 뗀후 혼자서 휴양, 사냥, 여행을 다녔고 정신이상증세도 보여서 제니의 간호를 받으며 살다가 1895년에 불치병으로 사망했다. 외도가 심했다는 랜돌프의 불치병이 매독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제니 또한 남편이 여행으로 부재중일때 에드워드 왕자나 다른 남자와 외출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미국신부 중 가장 성공한 결혼이었으나 결혼생활 중 늘 경제적으로 쪼들렸었다 하며 꼭 행복했던 부부생활은 아니었던 듯하다. 제니는 여러 가지 재능이 있었고 영국 여성들의 투표권 취득운동에 앞장섰고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위한 모금운동의 책임자로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미국신부들”의 지도자 역할도 하였으나 그녀의 여걸같은 자유분방한 성품 때문에 품행과목에는 ‘우’학점 을 받지는 못하였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정치역량을 발휘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윈스턴 처칠이 모친의 자질을 타고 나온 것도 같다.

그의 재치와 정치가로서의 역량이 어머니를 닮은 까닭이었는 지도 모른다. 제니는 글재주가 있어서 몇 권의 책도 발간하였다. 그녀가미국신부에 관해서 쓴 글들이 1908년에 영국의 잡지에 실리자 미국신부들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영국에서 해소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5년 만인 1900년에 20세 연하의 남자와 결혼했다가 1913년에 이혼하였다. 1918년에는23세 연하로 아들 윈스턴 보다 더 젊은 사람과 결혼했다. 그녀는 새 하이힐 을 신고 걷다가 넘어져서 발목이 뿌러져 무릎관절 위까지 자르는 수술을 받았으나 상처가 낫지 않고 곪아서 67세를 일기로 1921년에 사망하였다.

벼락부자급의 딸도 아니었던 제니 제롬이 연애끝에 자신이 직접 최고위 귀족 말보로가의 신랑 랜돌프 처칠도 만나고 지참금도 비교적 조금만 내고서도 성공적인 결혼을 했던 것에 비하면 철도왕 Cornelius Vanderbilt 의 증손녀 Consuelo Vanderbilt 는 어머니의 한풀이의 희생자로 역시 말보로가의 제9대 Duke 이었던 찰스 스펜서 처칠과 강제결혼하여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다가 결국 이혼을 한후 재혼을 하여 정상적인 행복을 얻은 사람이다.


위에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Consuelo Vanderbilt 의어머니 Alva Vanderbilt 는 아니꼽게 거드름을 피우는 성골급 마나님들에 대한 한풀이를 위해서 일찍부터모든 것을 준비 해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되어보지 못한 영국의 귀족부인이 되려면 우선 몸자세부터 바로 잡혀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딸이 성숙해지기 시작할 때부터 등 뒤에 매도록한 곧은 철봉으로 상체의 자세가 똑바로 유지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양순했던 딸을 훈련시키는데 회초리를 쓰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었다.

옷은 항상 어머니가 고른 것을 입게 하면서 “생각은 내가 할터이니 너는 시키는대로 잘 입기만 하면 된다” 라고귀족부인 훈련을 시켜왔었다. 집안에서 개인교수로부터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일찍이 배웠던 미국의 “갑순이” Consuelo 는 실은 사랑하는 총각이 있었고 두 사람은 비밀약혼을 한 사이였다. 그러나 딸의 행복보다는 귀족사위를 통한 자신의 사회신분 격상에 집념이 되어있던 Alva Vanderbilt 에게는 풋내기의 철없는 사랑같은 것은 없었던 일로 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갑돌이와 같이 elope (동반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딸을 감금시키고 갑돌이를 암살하겠다고 위협하여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딸의 뜻과는 상관없이 중매결혼이 추진되었는데 신랑후보는 “있는 것은 돈 밖에 없는 Vanderbilt 가” 에게는 “차고 넘치게 과분한” 말보로 가의 아들로 윈스턴 처칠의 사촌인 찰스 스펜서 처일이었다. 지참금으로는 Vanderbilt 회사의 주식 250만 달러 어치를 주기로 하고 매년 신혼부부 각자에게 10만 달러씩 20만 달러를 도와주기로 합의되었다.

Consuelo 가 이 결혼에 동의하지 아니하자 Alva 는 그날부터 아프다고 드러누었다. 양순한 Consuelo 가 결국 항복하자 “죽어가던” Alva 는 벌떡 일어나서 미국사상 최호화판 결혼식 준비를 하였다. 이 강제결혼으로 실성할 것 같았던 Consuelo는 결혼식이 있던 아침에 자기방에 감금되어 있다가 아버지와 함께 온 신부들러리들과 함께 결혼식장인 성당에가서 베일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1895년에 결혼식을 끝내었다. 이 결혼식은 두 명문가의 결혼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대서특필 되었었다.

같은 해에 모두 9명의 미국신부들이 영국 귀족들에게 시집을 갔다. Consuelo 는 결혼으로 Duchess 가 되고 아들 두 명을 낳았으나 소문이 날 정도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던 중 남편과 1906년부터 별거생활을 하였다.

파리에 가서 살던 Consuelo 는1921년에 남편과 이혼을 하고 그녀의 미모를 오랜동안 흠모해오던 Jacques Balsan 을 만나 같은 해에 결혼하였다. Balsan 은 프랑스군 중령으로써 최고공 비행기록을 가진 비행선 조종사이자 프랑스군에 군복을 납품하는 대방직공장주의 자제이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내가 본인의 의사를 꺾고 강제로 딸을 결혼시켰다”고 증언함에 따라 1895년의 찰스와의 결혼이 무효 (annulment) 이었음을 1926년에 인정받았다.

Consuelo 부부는 프랑스에서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하고 행복하게 살던 끝에 미국 롱아일랜드의 사우스 햄튼과 플로리다에서 살았다. 재혼 후에도 처칠가와는 친분이 유지되어 윈스턴 처칠은 방미시 Balsan 을 방문하였고, 그의 유명한 그림 하나는 Balsan 의 집에서 그린 것이었다. Jacques 는 1957년에, Consuelo 는 1964년에 사망한 후 영국의 둘째아들 묘소 옆에 묻혔다.

<조태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