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07) 미국의 산업화 시대 (1865-1900) ⑩

2016-06-03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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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D. 라커펠러(John D. Rockefeller)

공직으로 높이 출세하거나 거부가 된 사람들에게는 사실이거나 때로는 거짓인 일화가 많이 뒤따른다. 출처의 기억이 분명치는 않지만 John D. Rockefeller 에 대한 일화 한 마디 가 있다.

존은 사치했다거나 낭비했다는 얘기가 없는 비교적 검소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억만장자인 그가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는 것을 보고 어느 기자가 물어 보았다고 한다. “사장님, 자제는 좋은 음식만 먹고 자선사업을 한다고 많은 돈을 쓰고 다니는데 사장님은 점심에 샌드위치가 웬말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존은 “그 녀석은 부자 애비를 두었으니까 돈을 쓰는데 익숙하지만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두었던 탓에 그사람 같지 않소. 내가 어떻게 해서 돈을 좀 모았는지 이젠 알겠소?” 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존의 부인 Laura Celestia Spelman Rockefeller 는 거부가 된 후에도 항상 검소했다고 하며 남편이 거부 가 된 것에 대해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존은 자기의 성공에 부인의 충고를 잘 받은 덕택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일생 이야기를 읽다보면 늘 궁금한 것이 그 사람이 성공의 정점에 올라가던 과정이 제일 힘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점에 도착한 후 높아진 명예나 재산을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었는 지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위 두 가지에 다 성공 했다면 그 다음 궁금해지는 것은 그 사람이 그 명예나 재산을 자기 후손에게만 물려주었는지 여부에 대한 것이다. 위 세 가지의 관문을 다 통과한 성공한 사람들이 사실은 그리 많지 않다. 존D. 라커펠러는 앤드류 카네기와 함께 세 관문을 모범적으로 통과한 사람이다.


라커펠러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자이자 최고의 자선사업가들 중의 하나이었다. 그의 자선사업규모에 넋이 나갈 정도로 압도 당한 후에 우리는 거의 자기 방어적인 본능으로 “도대체 그사람의 자선사업 동기가 무었이었어?” 라고 힐문하기가 쉽다. 마치 라커펠러가 무슨 불순한 일이라도 했었던 것처럼.

라커펠러가 자신의 축재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생각하였고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러면 그렇지” 라고 중얼거리면서 그의 자선사업이 마치 적선이었고 천당 급행료에 불과했던 것처럼 깎아내리고도 싶어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자선사업 동기에 대해서 회의를 갖는 것은 참 불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총 5억5,000만 달러을 자선사업으로 내놓았다.

그가 1937년에 사망하였을때 재산은 14억 달러 (2015년 돈으로는 230억 달러로 미국 전체경제의 1.5%에 해당) 였다고 한다 그는 미국의 자선사업이 조직적이고 특정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한 근대 미국 자선사업의 원조이었다. 그의 자선사업은 대학교들의 설립과 개선을 통한 교육의 증진, 의료 및 공중보건의 연구와 개선, 과학연구에 주로 집중되었으나 국제관계 개선, 사회제도개선, 빈민들의 구호, 문학 증진 등 다양하고 더러는 조금 엉뚱한 분야들에까지 그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시적에 음악을 좋아해서 한때 음악가가 되어볼까 라고 생각했다는 얘기도 사실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자신은 대학교를 제대로 다녀보지 못한 사람으로써 그의 먼 미국의 앞날을 내다보는 사회를 위한 투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다소 작은 규모로 기독교 교계와 교회들을 창립하고 지원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뉴욕시에 건립한 리버사이드 처치( Riverside Church) 는 특기할 만한 공헌 중의 하나이다.

그의 교회가 속했던 침례교는 남부흑인들에게 우호적이었고 남북전쟁 후 노예에서 해방된 Freedmen 들의 교육을 위해 열성적이었다. 그는 여행 중에는 African American Baptist Church 교회들에서 예배를 보았고 항상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하였다고 한다. 그의 장인 Spelman 부부는 적극적인 노예해방주의자들이었는데 존은 흑인여성의 고등교육을 위해서 1884년 애틀란타에 Spelman College 를 창립하였다.

“Efficiency Movement” 를 지지했던 존은 당시의 미국의 고등교육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재들을 배출하지 못하고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그는 지원을 받는 학교들이 교육과정을 개선하고 학교가 자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학교의 후원자들을 늘리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해야 지원을 해준다는 Conditional Grant 를 하기 시작했었다.

그는 오하이오 주에 있는 침례교계 Denison University 와 다른 침례 교회계 학교에도 큰 액수의 지원을 해주었다. Denison University 는 반노예주의를 주장 했었으며 2014년에 뉴욕타임스가 미국의 11번째 최우수대학으로 뽑은 대학교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많이 주는 학교라고 한다. 그는 원래는 조그마했던 한 침례교계 대학교에 8,000만 달러를 기증하여서 그 대학교가 1900년도에 이르러서는 세계적인 명문인 University of Chicago 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1905년에 미국침례교 해외 선교부에 큰 기금을 헌금하여서 Central Philippines University 가 설립되도록 하였는데 이 대학교는 필리핀에 세워진 최초의 침례교계 대학이자 아시아에서 두 번 째의 American University 이었다.

그는 미국 전역의 각급 학교들에게 재정지원을 해주기 위해서 1903년에 General Education Board 을 창설하였는데 침례교의 전통적인 선교정책에 따라 남부 흑인학교들을 지원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동시에 예일, 하버드, 컬럼비아, 브라운, 웰슬리, Bryn Mawr, Vassar 등 동부의 명문대학교들에도 지원을 하였다.

그는 의학연구를 위해서 1901년에 Rockefeller Institute for Medical Research 를 뉴욕시에 설립하였는데 1965년부터는 Rockefeller University 라고 불리며 노벨상 수상자 23명이 이 대학교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이 대학교는 Carnegie Foundation 과 함께 미국과 카나다의 의학교육의 개선에 공헌하였다. 그는 1909년에 Rockefeller Sanitary Commission 을 설립하여 미국 남부의 가난한 농업주민들을 괴롭혀 오던 Hookworm (십이지장충) 을 박멸시켰다.

그는1913년에 Rockefeller Foundation 을 설립하여 Sanitary Commission 이 해오던 일도 계속하고 임무도 확장하였다. 그는 Rockefeller Foundation 에 2억5,000만 달러를 기금으로 내놓아서 Public Health, Medical Training 과 기타의 사회사업을 지금까지 지원해오고 있다. 이 재단의 설립 목적은 “Promoting the well- being of humanity throughout the world”인데 일년에 1억3,700만 달러를 각종 사회사업에 쓰는 이 재단의 자산은 2007년에는 47억 달러, 2008년에는 31억 달러 등이었다고 한다.

Rockefeller Foundation 은 미국에 최초로 Johns Hopkins School of Hygiene and Public Health 와 Harvard School of Public Health 에 기금을 주었다. 그는 재정지원을 하여서 중국 에 Peking Union Medical College 를 좋은 의과대학으로 만들었다. 이 재단은 남녀, 인종, 종교의 차별 없이 미국 각 지역의 학교들을 지원하였으며, 영국과 캐나다의 의료 개선을 지원하였고 Yellow Fever (황열병) 예방약을 개발하였으며, Nazis 독재를 피해나온 유태계 독일학자들을 교수로 써서 뉴욕에 New School 을 설립하였으며, 독일의 인류 우생학 (Eugenics) 연구를 지원하였는데 이 사업은 후일 논란이 있었던 듯하다. 독일에 Kaiser Wilhelm Institute’s Institute for Brain Research 를 건설하고 수 년간 운영을 지원하였다.

이 재단은 케냐와 수단 등의 의료개선에도 지원을 하였다. 라커펠러가 의료자선 사업에 많은 지원을 해준 데에는 먼저 사망한 부인이 원인을 잘 모르는 병으로 말년에 여러 해 고통스러워 했던 일과 자신이 말년에 온몸에 털이 다 빠져 나가는 괴질을 앓다가 사망했던 것들과 관계가 있지 않은가 싶다.

최고의 거부가 되고 많은 자선사업까지 하고나면 인간적인 욕심으로는 한 가지 더 남은 것이 있다. 고위 공직자로써 정직하고 충실하게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이 소원도 라커펠러는 넘치도록 이루었다.

그의 아들 John D. Rockefeller, Jr. 는 부친과 함께 자선사업에 모두 참여하였으며 라커펠러 센터를 짓고 부지를 기증하여 뉴욕에 UN 건물이 건축되도록 하였다. 그는 Museum of Modern Arts 의 부지도 기증하였다. 또 토지를 기증하여서 메인 주에 아케디아, 캘리포니아에 요세미티 국립공원들이 창설되도록 하였다. 둘째 손자는 뉴욕 주지사와 포드 대통령 아래서 부통령을 지낸 넬슨 라커펠러이다. 막내손자 데이빗 라커펠러는 체이스 맨하탄 은행의 회장을 했었다. 그외의 후손들 중에 주지사 두 명, 부지사 한 명, 연방 상원의원 (전 주지사) 한 명 등이 있었다. <계속>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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