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04) 미국의 산업화 시대 (1865-1900) ⑦

2016-05-13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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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dore Cornelius Vanderbilt (1794-1877)

미국의 재벌들은 모두 촌놈출신으로써 New York City 에 와서 떵떵거리고 살았던 것일까? 물론 아니다. 이제는 순수 “Made in New York City”재벌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Staten Island 출신이었음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당시에는 뉴욕시 시민은 아니었지만 Staten Island 가 지금은 뉴욕시의 다섯 보로 중의 하나이므로 그 재벌은 대강 “Made in New York City” 라고 얼버무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재벌이 Cornelius Vanderbilt 이다. Vanderbilt 제독이라고도 불리었으니 해군에는 전공이 많았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쉽다.

그는 1650년에 Indentured Servant (무일푼의 백인이민 희망자가 이민비용을 지불해준 스폰서와 몇 년간의 무임노동계약을 맺고 이민을 온 노동자)로 온 화란계 이민의 증손자였던, Staten Island 와 맨하탄 사이를 오가던 뱃사공의 아들로 태어나서 열한 살 적부터 학교공부는 접어두고 아버지를 도와 사공노릇을 하다가 16세 때에 아버지와 공동투자로 마련한 나룻배의 선장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가 얼마후 선장으로써 또 해운업자로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동업자들이 감탄해서 그를 “Commodore Vanderbilt” 라는 별명으로 불러주었다고 한다. Commodore 는 해군 준장인데 당시 미국 해군의 최고위 계급이었다. 그가 실제로 해군에 복무한 적은 없었다.


별 보잘 것 없는 집안출신으로 거의 무학인 그가 John D. Rockefeller 다음으로 미국에서 두세 번째가는 대재벌이 된 데에는 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고 타고난 비범한 재능이 있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평판이 다 듣기 좋은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hated or feared, unmannered brute, rascal, combative, cunning, shrewd, honorable, hard working” 등의 평판을들었으나 “….. but considered a builder than wrecker…” 이라는 평을 들었던 것으로 보아 대강 어떤 사람이었던지 짐작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19세 때인 1813년에 사촌동생인 Sophia Johnson 과 결혼해서 4남 9녀를 두고 맨하탄 에서 살았다. 자신의 뉴욕 연안의 해운업을 차분히 키워나가고 있던중 1817년에 뉴욕과 뉴저지를 오가는 Gibbon 회사의 증기선의 선장이 되었고 곧 그회사의 총지배인으로 승진하여서 대규모의 사업체를 경영하는 중요한 경험을 얻는다.

Gibbon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자기의 해운업을 계속 유지하였고 부인도 여인숙업으로 돈을 잘 벌어서 자녀들의 교육도 잘 시켰다. Gibbon 회사에 있는동안에 경쟁회사의 뉴욕과 뉴저지 간의 독점운항권이 위법이라고 미국 대법원에까지 소송을 하여 뉴욕주의 독점운항권 허가는 위법이라는 판결을 얻어내었는데 이판결은 미국의 해상운송에 대한 중요한 판례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는 Gibbon 회사의 사장이 사망한 몇 년 후에 그회사를 인수하였으며 롱아일래드 해협의 운항과 매사추세츠 와의 운항, 허드슨 강을 이용한 뉴욕 업스테이트 등으로 활발하게 해운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경쟁회사를 운임경쟁으로 파산이 되도록도 만들었고 다른 경쟁회사와는 불경쟁 비밀협약도 맺어가며 183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뉴욕시 주변 해운업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849 California Gold Rush” 가 있기 조금전에는 대양을 항해하는 증기선들을 운항 하여서 동부에서 캘리포니아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파나마나 니카라과 까지 수송한 후 육로로 태평양 쪽까지 수송하여서 다시 캘리포니아 까지 증기선으로 수송하였었다.

남북전쟁 초기에 그는 그의 소유 선박들 중에서 제일 큰 Vanderbilt 호를 북군에 기증하려고 하였으나 전쟁이 길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큰 배의 운영비조달을 우려한 정부가 배의 인수를 거절하였다. Vanderbilt 는 월세를 받고 미해군에 배를 대여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고 남군의 해군력이 강해지자 정부는 선원들까지 포함된 Vanderbilt 호를 받아서 썼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 Vanderbilt 는 미 국회로부터 최고의 훈장인 골드메달을 받았다.

184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뉴욕과 Boston, Providence 등을 연결하는 철도회사 들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꾸준히 철도회사들을 구입해가는 과정에서 경쟁철도회사를 고의로 폐망하게도 하고 철도회사 주식의 구입과정에서 큰 사기를 당해가면서도 꾸준히 확장을 계속해서 결국 미국 중동부에서 제일 큰 New York Central Railroad 가 생겨났고 그의 열차만이 Manhattan 26th Street 까지 내려오는 철도가 되었다.


철도로 엄청난 재벌이 된 Vanderbilt 는 1869년에 맨하탄 한복판인 42가에 Grand Central Depot역사를 지었다. 현재에 42가에 있는 Grand Central Station 역사는 New York Central Railroad 회사가 1913년에 그전 역사의 자리에 새로 지은 뉴욕시 최고의 관광명소로써 수많은 일화들이 얽혀있는 뉴욕시 중요역사 유물 중의 하나이다.

모든 편의시설들이 다 갖추워진 이 아름다운 역사는 높은 천정을 전기로 우주천체의 별들로 장식해 놓았는데 처음 만들어 놓은 후에야 동서가 바뀐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New York Central 회사에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별자리들의 동서가 지상에서 보는 것과는 반대로 보인다” 라는 애교섞인 변명을 하였다고 하며 그 후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때에도 별자리는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뉴욕시 재개발의 일환으로 1970년대에 Grand Central Station 을 철거하려고 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재클린 케네디가 위원장이 되었던 Grand Central Station 보존위원회의 강력한 저지운동으로 철거계획은 취소되었다. 뉴욕의 가장 귀한 골동품이 천행으로 구제되었던 것이다.

엄청나게 모은 재산에 비해서 Vanderbilt 가 사회에 환원한 액수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는자신과 자녀들이 미국동부 도처에 Vanderbilt Mansions 라고 불리는 큰 저택들을 지어 놓았는데 뉴욕주의Hyde Park 에도 저택이 하나 있다. 맨션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애쉬빌에 8000 acres 의 땅에 1889년부터 1895년 사이에 아들 George 가 지은 Biltmore House 이다.

미국의 개인저택 으로는 가장 크다는 이 저택은 135,080 평방 feet 의 living space (250개의 방, 침실 33개, 욕탕 43개, fire place 65개, 부엌 3개) 가 있는 mammoth 이지만 미국건축기사협회가 선정한 여덟 번째로 유명한 미국 Gilded Age (졸부들이 활개치던 ‘금박의 시대’)를 대표하는 4층짜리 개인저택이라고 한다. 지금도 Vanderbilt family 소유로 있는 이 저택을 관광하러 오는 방문객들을 위한 호텔 까지 근처에 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 폐허가 된 남부의 재건과 남북간의 화해를 위해서 1872년에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가 테네시 주의내쉬빌에 종합대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기금이 모자라 중단상태에 있었다. 이 대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있었던 Vanderbilt 의 사촌동서가 50만 달러 정도를 기증하라는 권고를 하자 막상 내쉬빌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그 취지에 찬동하여 그는 1백만 달러 (2013년 금액 으로 2천만 달러 정도)을 기증하여 추후 Vanderbilt University 가 된 The Central Universi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South 가 1873년에 설립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 대학교를 가보지 못하였다.

그는 45세 연하인 두 번째 부인이 나가던 교회의 건물을 5만 달러를 주고 사서 기증하였으며 뉴욕지역의 여러 교회들에 헌금을 하였었다. 또 Staten Island 에 있는 Moravian Church 에 교회묘지로 쓰도록 8.5 에이커를 기증하였는데 그 교회묘지에 Vanderbilt 의 묘소가 있다 한다.

그가 사망했을 때에 남긴 유산은 1억 달러 정도이었다고 하는데 2007년 돈으로 1천4백30억 달러쯤 되는 것으로추정된다고 한다. 그는 유산의 95% 를 큰아들 William 에게 남겼는데 그는 William 이 가장 재산을 잘 보존할 수 있는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라고 한다. 자녀들과 손자녀들에게는 2백 달러, 3백만 달러~ 25만 달러 정도까지 남겨주었는데, 제일 작은 액수도 현재의 돈으로는몇 백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한다. 부인에게는 50만 달러와 집을남겨 주었다. 큰 아들 William 의 고손녀가 designer Gloria Vanderbilt 인데 그녀의 막내아들이 CNN 의 앵커맨인 Anderson Cooper 이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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