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03) 미국의 산업화 시대 (1865-1900) ⑥

2016-05-06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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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03) 미국의 산업화 시대 (1865-1900) ⑥
J. P. Morgan (계속)

1890년에 이르러서 미국이 세계최고의 공업국가가 되기까지는 천재적인 대기업가들의 모험감수와 피나는 노력이 있었는데 ,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미국의 성공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에 허허벌판을 공.상업 대도시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실패한 기업들이 성공한 기업들 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며, 실직으로 고생한 사람들이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 만큼 많았을 것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적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에서 과잉투자, 과잉생산 등으로 실패하는 기업들이 많은 상태에서 경영이 부실한 기업들의 정리와 통폐합은 어쩌면 불가피하고도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자연에서 먹이사슬 최고봉에 있는 사자나 호랑이가 없어지면 늙고 병든 동물들이 너무 많아져서 하류동물들의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는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절대적인 전제권력자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자본주의에는 자생적인 정리사 들이 병존하여야 하는 것인 듯싶다.

미국의 일부 역사가들이나 비평가들 중에는 미국 산업화시대의 대재벌들을 “Robber Barons” 라고 비꼬아 불렀고 지금까지도 탐욕스러운 대재벌들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 들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Robber Baron 들이 없이 존속될수 있는 것인가?” 라는 반문에 만족스러울 만한 대답을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J.P. Morgan 은 Robber Barons 중에서도 공작급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최대 금융투자가로써 활동한 것을 보면 사욕만을 취한 날강도 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본주의 생리에 능통한, 자본주의에 윤활유를 쳐준 사람” 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더 정당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Morgan 의 부친은 투자를 조심스럽게 하면서 성공한 은행가로써 아들에게 항상 “경쟁이 심한 곳에 투자하지 말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그러나 Morgan 은 부친의 충고에 반발이라도 하는듯 경쟁이 심하고 위험성이 많은곳에 과감하게 투자해서 거부가 되고 정계와 금융가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그의 과감한 투자활동을 본 당시의 사람들은 Morgan 을 해적 이란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어떤 역사가들은 Morgan 이 자기의 별명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던 듯 하다고 얘기한다.

사실 그는 두 어깨가 딱 벌어진 큰 체구에다가 남의 눈을 꿰뚫는 것같은 매같은 눈초리를 가졌고 어렸을 적에 앓은 병으로 코가 이상하게 변형되 있는데다가 피부병으로 항상 빨갰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해적같은 인상을 준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이었던지 그는 사진 찍기를 싫어하였으며 그의 초상화에는 항상 코가 수정되었다고 한다.

그는 소시적부터 장사꾼이었던 것같다. 남북전쟁 중에 총기상으로부터 고장난 헌총 5,000 자루를 한 자루에 3달러50센트에 사서 야전군 지휘관에게 한 자루에 22달러씩을 받고 되팔았다고 한다. 그 자신은 당시 법이 허용했던대로 300달러을 주고 대리인을 보내서 병역을 면했다고 한다.

Thomas Edison 의 발명 등에도 투자하였던 Morgan 은 뉴욕시에서 최초로 Morgan’s Palace 라고 불렸던 자기의 개인집에 전기를 설치한 사람이었다. Morgan 은 몇 번의 통폐합 끝에 General Electric Co. 를 1895년에 설립하였고 1896년에는 New York Times 도 소유한 적이 있었다.


180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미국 전국에 철로가 건설되어서 과잉투자로 철도회사들 간에 경쟁이 극심해져서 도산이 되고 생존한 회사들도 허덕거리고 있었다. Morgan 은 철도 회사들을 헐값에 구입하여 통페합을 한후 미국 철도 전체의 6분의1에 해당되는 11개의 철도시스템으로 1만9천 마일의 철로를 가진 튼튼한 철도회사를 만들었다. 많은 직원들이 실직으로 희생되었지만 패망의 길로 가고 있던 철도업을 회생시킨 것이었다.

Morgan 이 기업통폐합과 구조조정의 투자전문가가 되었던 까닭에 구조조정을 “reorganization” 이라 부르지 않고 비꼬아서 “morganization”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론 이과정에서 Morgan 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

Andrew Carnegie 의 얘기를 하면서1901년에 Morgan 이 Carnegie Steel Co. 를 4억8천만 달러에 샀다는 얘기를 했었다. 얼른 믿어지지 않는 얘기이지만 Carnegie Steel 을 살때에 변호사도 쓰지 않았고 계약서도 없었다고 한다. Morgan 은 다른 여러 철강회사도 계속 구입해서 통폐합하고 시설을 확충한 후 미국의 철강 총생산량의 60%를 생산하는 독점기업 U.S. Steel Corp. 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1901년에 U.S. Steel Corp. 의 성적이 예상에 다소 미치지 못하자 그 회사의 Schwab 사장은 U.S. Steel Corp. 을 사임하고 미국 제2의 철강회사인 Bethelehem 철강회사를 1902년에 설립하였다. Morgan 은 U.S. Steel Corp. 을 주식과 사채를 통하여 투자자들에게 15억달러를 받고 팔았다.

Morgan 은 Portland Cement 와 International Harvester 등에도 투자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투자한 것이 모두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1900년대 초에 미국과 영국을 연결하는 해저유선케이블 건설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본적이 있고, 런던의 지하철에 투자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고 ,해운업에 손을 댔다가 손해를 본 적도 있었다.

첫 번 항해중 닷새 만인 1912년 4월 15일에 승객 2224명 중 1,500명 이상과 함께 침몰한 비극적 여객선 Titanic 호에도 투자했다가 손해를 보았는데, 원래에는 Titanic 호에 발코니를 갖춘 그의 suite 도 지어놓고 배를 탈 예정이었으나 배를 타지 않아서 참변을 면하였다.

Morgan 은 애국을 하면서 동시에 치부를 한적도 있었다. 금본위 화폐제도를 쓰고 있던 미국은 1894년에 큰 재정위기를 맞았다. 금본위 제도 하에서는 지폐 (gold certificate 나 silver certificate 이기도 했던) 를 은행에 가지고 가면 일정량의 금 (은)받을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금본위제도는 지폐발행량에 합당한 금(은)을 연방정부가 보관하고 있음으로써 지폐의 신뢰도를 보증해주는 제도이다.

1894년에 지폐를 금으로 환금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연방정부의 금 재고량이 줄어들기 시작해서 미국지폐의 신뢰도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대통령을 포함하여 모두가 머리를 짜내어 보았으나 미국의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태가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의 Cleveland 대통령은 Morgan 과 상의하였다.

유럽의 금융계에도 영향력이 컸던 Morgan 은 1895년에 6천5백만 달러의 미국국채를 유럽의 금융시장에 팔고 유럽에서 3백50만 온스 의 금을 사들여와서 미국의 화폐위기를 넘기도록 하였다. 물론 Morgan 은 이 절차들에서 발생한 커미션을 다 벌었다.

Morgan 은 희귀한 고서적, 값비싼 예술작품, 귀한 보석들의 대수집가 였다고 한다. 그는 그전부터 많은 재정지원을 해주었던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와 Museum of Modern Arts 등의 박물관에 자기의 소장품을 기증하거나 대여해주는 등의 방법으로 일반 관람객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901년에는 Harvard University Medical School 에 100만 달러가 조금 넘는 액수를 기증하였고, 1906년에는 뉴욕시 36 St.와 Madison Avenue 의 코너 에 J.P. Morgan Library & Museum 을 건설하였다.

1907년에 주식가격 등이 폭락하는 증권파동이 있었다. Morgan 을 중심으로한 금융 투자은행들의 노력으로 파동은 수습될 수 있었다. 미국 기업들의 독점과 금융투자가들의 횡포는 자본주의의 속성이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불법을 통제할 법규들이 없었고, 정부기관들이 없었던 탓이기도 하였다. 1912년에 연방하원조사위원회는 Morgan 등을 소환하여 금융투자가들의 활동을 조사하였고, 금융투자가들의 영향과 집권정권의 간섭으로부터 금융 화폐제도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하여 1914년에 Federal Reserve System 을 재편성 강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증권업계와 투자금융 은행들의 무절제 와 무질서로 결국 미국은 1929년의 대공황을 맞게 된다. 증권거래의 통제를 위해서 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때인 1933년에 Securities Exchange Act 가 제정되고 Securities Exchange Commission (SEC)이 창설되었다.

Morgan 은 여행 중에 로마에서 1913년 3월 30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운구가 뉴욕을 통과하던 날에 월스트릿에는 조기가 걸렸으며 뉴욕증권거래소는 조의를 표하기 위해서 두 시간 동안 증권거래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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