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01) 미국의 산업화 시대 (1865-1900년) ④

2016-04-22 (금) 조태환
크게 작게
Andrew Carnegie
Carnegie 는 1900년에 연수입이 2, 500만 달러가 되었다. 소득세가 없던 시절이 었음으로 이 수입은 순수입이었다. 이 때에 회사합병, 구조조정 등의 금융투자로 독점기업들을 만들어서 정계와 경제를 주물럭 거리고 있던 J. P. Morgan 은 철도의 통합으로 또 한몫을 보고 난후 철강산업을 다음 번 목표물로 찍어 두고 있었다.

중간에 사람을 넣어서 Carnegie 의 의중을 떠 보았는데 아직 Carnegie Steel 을 팔 생각이 없었던 Carnegie 는 Morgan 의 제안을 거절하는 의미로 반농담삼아 “5억달러” 라는 숫자를 언급했다고 한다. 철강산업 을 독점기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Carnegie Steel 을 꼭 입수해야 했던 Morgan 은 사겠다 는 뜻을 전하고 흥정 끝에 4억8천만 달러(2016년돈으로 137억 달러)에 Carnegie Steel 을 1901년에 구입하였다. 드디어 Carnegie 는 자선사업에 전념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었다.

이제는 Carnegie 의 재산 사회환원에 대해서 써 보고자 한다.
우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Carnegie 는 총 350,695,653달러 (3억) (2015년 돈으로 769억달러: Wikipedia 추산) 을 사회에 환원하였는데 이 액수는 Carnegie총재산의 90%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의 외동딸에게 재산을 얼마나 남겨주었는지는 미상인데 그 딸이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의 영구이사로 봉사하도록 하였다.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은 계속적인 자선사업을 총괄하기 위해서 1911년에 설립된 재단이다. Carnegie 의 마지막 남은 재산 3천만 달러도 자선사업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과연 “자선사업의 아버지” 라고 불릴만 하지 않은가!

그는 많은 저서 이외에도 당시의 문학, 철학, 사상가들과 계속적인 교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영어철자법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Simplified Spelling Board 를 설립하여 “Handbook of Simplified Spelling”(1920) 라는 책을 simplified reformed spelling 을 써서 그의 사망 1년 후에 출간하였으나 그의 생각이 대중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Carnegie 는 그가 어려서 단칸 방에서 살던 고향인 스코틀랜드의Dunfermline을 1881년에 어머니와 함께 방문하여 공공도서관을 설립하여 주었다. 70세가 된 Carnegie 의 어머니가 도서관의 초석을 놓았다고 한다. 그곳에 수영장과 공원도 건립하여 주었다. 추후 그 타운은 Carnegie 의 동상을 세웠다 고 한다.

그는 1901년에 노조농성파업으로 인명들을 잃은 적이 있는 Homestead 공장의 은퇴자들을 위한 연금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조직교단을 특별히 지지한 것은 없는듯 하지만 미국의 7천 여개의 교회들에 오르간 을 건립해 주었다고 한다. 교육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은 TIAA-CREF 가 된 대학교수 은퇴연금 기금을 1905년에 세우면서 종교기관과 연결이 되어 있는 대학교들은 종교기관과 연결을 끊어야만 연금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흑인 Booker T. Washington 박사가 총장으로 있던 흑인대학교 Tuskegee Institute 을 많이 지원해 주었고 Washington 박사가 설립한 National Negro Business League 도 후원하였다. 1911년에 그는 Mt. Wilson 위에 100 inch (1.5 미터) 짜리 천체망원경 을 설치하는데 1천만 달러을 도와주었다. 1884년에는 Bellevue Hospital Medical College 에 5만 달러를 기증하였다. 지금은 New York University Medical Center 의 일부인데 Carnegie Laboratory 라고 한다.

그는 미국, 캐나다와 기타의 여러 영어권 나라들에 총 2.509 (3,500 이나 3,000이라고도 함) 개의 공공도서관을 세웠는데, 그 중에 1,679 개는 미국의 47개 주에 세운 것이다. 이미 추진 중에 있었던 New York Public Library의 건축에도 큰 도움을 주어서 완공되도록 하였다. 그는 “Patron Saint of Libraries” 라고 불린다.

Carnegie 는 반제국주의자이었으며 국제평화주의자였다. 미국은 국시로 종교의 자유, 인간 평등, 반독재주의, 반제국주의 등을 존중해오고 있는 나라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때로 국시를 저버리는 일도 있었고 지난 100여년의 역사만을 보면 미국이 건국이념 을 잊어버린 나라같이 보이기도 했다.


미국에는 항상 사상적인 갈등이 계속되어 온 나라이다. 때로 갈등의 정도가 조금 심각해져서 나라가 분열될 거라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미국은 이런 사상의 대조와 갈등 때문에 항상 건강하고 젊어지는나라이다.

19세기 말쯤에 Henry Thoreau 등의 명상주의자, 평화주의자들은 미국의 국력이 강해 지고 국제분쟁에 점차 휘말리기 시작하자, 미국의 건국이념이 훼손되고 부패해 간다는 우려를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과의 짧은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후일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텍사스와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의 주들이 된 땅들도 스페인으로부터 분명하게 뺏어온 후에는 쿠바와 멕시코까지 미국영토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는 사람들까지 나왔다.

남태평양의 자그마한 여러 섬들까지 영토로 확보한 미국은 1898년에는 비율빈을 2천만 달러를 주고 스페인으로부터 구입했다. 미국 내의 평화주의자들은 미국이 “제국주의국가”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고 심각한 우려들을 표시하였다. 필리핀의 “반제국주의 독립투사들은 미군과 치열한 투쟁을 하였고 미군들의 전투중의 잔학성이 미국에 알려지자 미국내의 보수, 진보 진영간의 논쟁이 아주 심해졌다.

이 와중에서 Carnegie 는 1900년대 초에 필리핀 국민에게 2천만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그 돈으로 미국에서 필리핀을 도로 사서 독립국가가 되라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일 필리핀 사람들이 없어서 Carnegie 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런 제안은 Carnegie 의 생각과 과단성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생각된다.
Carnegie 가 설립한 아래에 적은 사회 자선사업기관들을 보면 그의 자선활동 성격과 규모가 대강 나타난다.

Carnegie Hall (1891)
Carnegie Museums of Pittsburgh (1895)
Carnegie Institute of Technology (1900)추후 Carnegie Mellon University 가 되었음.
Carnegie Trust for the Universities of Scotland (1901)
Carnegie Institute at Washington, D.C. (1902)
Carnegie Institution for Science (1902)
Carnegie Dunfermline Trust (1903)
Peace Palace at the Hague (1903)
Pan-American Palace in Washington (1903)
Carnegie Hero Fund (1904)
Carnegie 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Teaching (1905)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1910)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11)
Carnegie United Kingdom Trust (1913)
Carnegie Council for Ethics International Affairs (1914)

뉴욕시의 2 East 91st Street (5th Avenue) 에 있고 1901년에 지은 Carnegie 의 뉴욕저택 은 지금은 Cooper Hewitt, Smithsonian Design Museum 이 되어있다. 대략 86가 에서 98가 사이에서 서쪽으로는 센트럴 팍, 동쪽으로 렉싱턴 애비뉴까지의 지역을 Carnegie Hills Historic District 라고 부르는데 이 지역 안에 몇 개의 박물관들, 부자들의 집들, 오래된 Brownstone House들이 있다.

Carnegie 는 사망한 후 뉴욕주의 노스 테리타운(North Tarrytown)의 The Sleepy Hollow Cemetery 에 안장되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묘소는 Samuel Gompers 의 묘소에서 불과 몇 야드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Gompers 는 어려서 영국에서 이민 와 cigar 말이 노동자로 시작한 사람인데 노조운동의 창시자로써 미국노동자 운동의 거물 지도자 였다. 필자는 이승에서는 앙숙이었던 두 사람이지만 저승에서는 서로 악수하며 화목하게 지내고 있을 것으로 상상해 본다.

<조태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