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00) 미국의 산업화 시대 (1865-1900) ③Andrew Carnegie

2016-04-15 (금) 조태환
크게 작게
Carnegie 는 타고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초지일관적인 투지력이 있었으며 대인관계가 좋았던지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고 사업확장에 지인들의 계속적인 도움도 많이 받았고 인맥도 잘 이용하였던 듯하다. 또 축재하는 과정에서 좋은 운들도 따랐던 사람이었다. 학교교육은 소학교 정도밖에 받지 않았으나 꾸준한 다방면의 독서로 아주 높은 지식과 넓은 교양이 있었던지 경제, 학술 인사들과 교신도 많이 하였으며 여러 모임에 연사로도 자주 초청되었다고 한다.

정신없이 바쁜 생활중에서도 Peace vs. War, A League of Peace, ABC of Money, The Gospel of Wealth Essays…, The Empire of Business, 자서전, 여행기등 다방면의 저서 20여권을 집필하였고 정치인으로써 직접 정치에 참여해본 것을 빼고는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에 구상해 보던 것들을 거의 다 이루어 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구상 대부분은 아주 건설적이며 사회에 유익한 것들이었다.

그는 상당한 외고집이 있었던것 같고 종교인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성조직 교회를 전적으로 신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청난 부를 축적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인생의 목적은 축재에 있지 않다”고 자주 말했다고 하며 축재한 부를 후손에게 상속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18세 때에 펜실베니아 철도회사에 Secretary/Telegraph Operator 로 직장을 옮겼는데 , 곧 미국 굴지이었던 이 대회사의 사장 John Edgar Thomson 과 중요간부 Thomas A. Scott 의 눈에 띄게 된다. 그들은 Carnegie 를 곧 피츠버그 사무소의 수퍼바이저 로 임명하였고 그들이 회사내부정보 (insider information) 를 이용해서 쉽게 돈을 벌던 회사에 Carnegie 도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요즘은 insider information 을 이용한 투자가 불법이지만 그당시에는 흔히 있던 부정사업들이었던듯 하다. 이 투자를 위해 Carnegie 는 시가 700달러 짜리 어머니의 집을 담보로 600달러를 융자받아 500달러를 투자하였다고 한다. Carnegie 는 이 두 인사들과 꾸준이 친분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상호 투자도 계속 하였다고 한다.

Carnegie 는 펜실베니아 철도회사에서 경영술과 경비절약 방법등을 많이 배웠다고 한다. 남북전쟁 중에 Scott 는 전쟁부차관 (군수물자수송담당)이 되었는데 Carnegie 를 철도수송 부서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Carnegie 는 1864년에 펜실베니아 서부의 Oil Creek 에 있는 농장에 4만 달러를 투자하였는데, oil 이 산출되어 일년안에 100만달러의 배당금을 받았고, 그후에 아주 좋은 가격에 그 땅을 팔았다고 한다. 투자를 잘할 줄 아는 눈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얼른 믿어지지않는 재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강사업에 투자하기 시작하였고 인맥을 통해서 철도회사들에 철로를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인근의 작은 철강회사들을 구입하기 시작하여 점차 사업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남북전쟁으로 무기와 기타 물품들의 제조를 위해 강철의 수요가 많이 늘어났다.

미국은 주로 해안과 강 주변에 도시들이 형성되었고 공장들도 대부분 도시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업과 도시들이 확장되기 시작하자 강을 선박으로 일일히 건너야 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기왕의 목조다리로는 넓은 강을 건너 뛰기가 쉽지 않았고 목조다리가 오래가지도 못하였다. 드디어 교량의 혁명이 일어났다. Carnegie 는 1865년에 Keystone Bridge Co. 를 설립하였고 7년간의 공사끝에 1874년에 세인트루이스에서 미시시피 강을 건너는 철도와 도로 복합용인 The Eads Bridge 를 완공하였다. 이 철교는 6442 feet (1964 m) 로써 아치형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긴 철교였다. 이 철교는 1964년에 National Historic Landmark 로 지정되었다. Carnegie 의 Keystone Bridge Co. 는 미국에서 가장 큰 철교건설회사 28개 중의 하나가 되었다.

Carnegie Steel Company가 1892년에 창설되었다. 철로와 철교용으로 쓰인 강철은 실은 오래 전부터 제조되고 있었으나 제조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비싼 칼 등의 소도구에나 쓰일 수 있던 고가 의 귀중품이었다. 그런데 마침 영국의 Sir Henry Bessemer 라는 발명가가 용광로에 온도를 높히고 공기를 불어넣는 혁신적인 공법을 발명하여 강철제조 비용을 대폭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Carnegie 는 이 새공법을 곧 쓰기 시작하여 강철을 저렴하게 많이 생산할 수 있었다. Carnegie 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을 싫어한 사람 이었다. 당시의 전형적인 자본가들이 아마 대부분 노동운동을 싫어했을 것이다. Carnegie Steel 의 Homestead 공장에 Bessemer 공법을 쓰기 시작하자 생산성이 늘어나서 회사에는 좋은 일이었지만, 그 효율성의 증진은 동시에 노동자들을 더 힘들게 일하도록 만들었으며, 실직의 위험성이 더 높아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경비절약이 노동자 임금의 상승으로 직결되지도 않아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드디어 1892년에 노동자들의 공장농성투쟁이 일어났고 회사의 경영을 맡았던 Flick 사장은 Pinkerton Agency 의 사설경찰을 동원하고 파업중단을 위해 strike-breakers 라는 깡패들을 동원해 큰충돌이 일어났다. 노동자 7명, 경비원 3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일어났고 Carnegie 는 악랄한 노동착취 자본가라는 악명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Homestead 사건보다 훨씬 더 참혹한 사고에 Carnegie 가 또 휩쓸린 일이 있었다. 펜실베니아 서부에 Johnstown 이라는 공장지역에 Cambria Iron Works 라는 철강회사가 있었고 그 공장에서 일하던 Wales 와 독일계 공장노동자들 3만 명이 살고 있었다. 저지대인 Johnstown 에서 계곡을 따라 14마일 정도로 올라가면 South Fork라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원래는 1853년에 운하공사의 일환으로 큰 저수지를 만들어 놨었는데 운하공사가 중지되면서 그냥 방치해 두었던 것이었다.

Carnegie 회사의 Flick 사장은 1881년에 높이 72 피트, 넓이 931 피트나 되는 댐이 있는 이 저수지가 관리의 부실로 여러 군데에서 물이 새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해서 댐을 더 높이고, 그곳에 South Fork Fishing and Hunting Club 을 만들어서 Carnegie, Mellon 등을 포함한 거부 50여 명을 회원으로 하는 사설 휴양지를 만들었다. Carnegie 는 회원으로 가입했을뿐 투자도 하지 않았고 club 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1889년에 심한 폭우가 왔고 South Fork 댐은 물이 불어나 견디지 못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2천만톤이나 되는 물이 시속 40마일의 속도로 마치 미시시피 강이 흐르는 것처럼 계곡을 따라 내려와 중간에 있는 몇 개의 타운을 다 휩쓸고 많은 인명피해를 낸 끝에 Johnstown 을 호수처럼 물로 덮어 버렸다. 2209 명의 익사자가 났고 1,700만 달러 (2015년 돈으로 4억5천만 달러) 의 재산 피해가 있었으며 , 사고 직후 동원된 미 적십자사가 6개월 동안이나 구조활동을 했어야 했다.

미국 전국과 18개의 외국에서 구호물자들이 왔었다고 한다. 물결에 떠내려와 Johnstown 에 쌓인 것들이 너무 많아서 군데군데를 다이너마이트 로 폭파하고 불을 질러 다 태웠다고 한다. 더욱 비참했던 일은 Flick 이 회원들의 재산과 클럽과는 연관이 되지 않도록 조치를 해놓아서 수많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홍수피해자들이 피해보상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판사들은 South Fork Dam 의 붕괴사고가 천재지변이었다고 판결을 했다고 한다. 미국의 역사에도 기록이 되는 이 참사의 판결을 보고 미국민 전체의 여론이 나빠져서 책임, 피해보상 등에 관한 법률들이 생겼다고 하며 그 참사이후의 다른 사고들에 대한 판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Carnegie도 고소를 받았으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Carnegie 는 복구된 Johnstown 에 공공도서관을 지어 주었는데 지금까지 Johnstown Library and Museum 으로 유지되고 있다 .

<조태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