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평화만이 지고선(至高善)

2016-02-01 (월) 07:22:52 최효섭 (아동문학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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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17일, 프란시스 교황이 유대교 씨나고그(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여러 매스컴의 찬사를 받고 있다. 교황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대적하는 것은 어느 종교에서도 용납 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였다. 그가 타종교를 용납하는 행위는 그의 선임 교황이었던 베네딕트 16세와 요한 2세 등의 전례를 밟은 것이다.

교황의 방문을 받은 래바이(유대교 사제) 쎄그니 씨는 “교황을 환영한다. 이것은 종교 사이의 평화를 말하는 강한 싸인이다.”고 환영사를 하였다. 교황청은 이스라엘과의 친교를 위하여 적극적인 행보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타종교와의 평화 움직임은 이스라엘 아랍간의 평화 움직임에도 큰 영향을 일으킬 것이라는 전망이다.

‘마틴 루터 킹의 날’을 국가공휴일로까지 정했지만 미국의 인종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그렇지 못하다. CNN의 조사에 의하면, 지난 10년간 미국민의 인종차별은 “오히려 증가했다가 64%”, “감소되었다가 겨우 10%”, “별 차이가 없다가 25%”였다. 차별철폐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한 세기는 ‘전쟁의 100년’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전쟁을 계속하면서 귀중한 진리를 배웠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이념)보다 자유가 낫고, 자원보다 두뇌가 나으며, 대립보다 공존이 낫다’는 진리였다. 대립이란 우월성의 충돌이니 결국 인간의 교만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공존은 서로 돕고 함께 잘 되자는 것이다.

여기에 협력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아집을 버리고 가슴을 열어야 한다. 상자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넓은 하늘을 날아야 한다. 집단개인주의를 이 부영 교수는 ‘끼리끼리 병’이라고 불렀는데 한국인이 급히 극복해야 할 병이다. 내 집안, 내 교회, 내 회사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화합과 공동체를 깬다. 인류의 화두는 ‘더불어 사는 지구촌’이어야 한다.
화음(Harmony)을 피풀스 사전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화음이란 서로 다른 소리를 하나로 묶는 작업이다. 그래서 더 자연스럽고 발전된 새 질서를 창조하는 음악 형성 3대 요소 중 하나이다.” 내가 전체의 화음에 기여하는 하나의 작은 소리가 되는 것이 민주시민의 길이며, 소위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는 것이다. ‘샐러드 접시’처럼 다양(多樣) 속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

민주주의 사회에 권위주의는 없어야 한다. 정치의 독재자는 물론이요, 가정에서도 아버지나 남편이 권위주의로 집안을 다스려서는 안 된다. 교회나 회사에서도 목사, 사장이 권위주의로 교인과 사원을 다스려서는 안 된다. 예수까지도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낮은 자세를 취하지 않았는가!

다수파가 소수파의 의견을 지긋이 들으며 자기의 의견을 밀고 나가는 인내의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이다. 수가 많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얕은 생각 때문에 무리가 생기고 사람을 기계로 만드는 모순이 발생한다. 가정에서도 힘없는 노인이나 아이들의 의견이 존중되고, 교회에서도 여성이나 소수의 의견을 충분히 듣는 훈련이 곧 민주주의 훈련이다.

예수는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하셨다.(마태복음 5:9) 평화를 희망하거나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위하여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이 있다는 말씀이다. 좁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여 400만 명이 죽었다. 미군 전사자만 5만4,246명, 부상자 10만3, 284명의 참사가 벌어졌던 것이다. 고아 과부 이산가족이 홍수를 이루고, 가옥 교량 도로 공장들이 파괴되어 한반도는 초토화되었다.

이런 비극이 또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평화는 남북한 모두의 지고선(至高善)이다. 다른 선택은 없는 것이다.

<최효섭 (아동문학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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