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88) 미국의 혼동스런 대통령 선거제도와 1876년의 대통령선거②

2016-01-22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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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또 한번 미국 대통령선거 제도의 약점이 형편없이 드러났다. 대통령 취임식 이틀 전까지 누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인지를 확인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 난제도 결국은 새로운 전통을 하나 더 세우면서 합법적으로 해결하였다. 과연 미국적이다.

미국헌법이나 그때까지의 법률 어디에도 1876년의 대통령 선거와 같은 경우를 처리할 수 있는 규정이 없었다고 한다. 헌법 제12개정에는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상원의장은 양원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거결과 보고서를 개봉하고 집계하도록 되어 있으나, 1876년처럼 각 주에서 두 개의 상반된 보고서가 올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던 것이다. 만일 공화당 소속이었던 당시의 상원의장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면 그는 물론 185대 184로 Hayes 가 당선되었다고 선언했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양당의 결사적이고 극적인 타협이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 취임식을 몇 주 앞두고 국회는 이 난제를 처리할 15인 특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 특별위원회는 상황을 연구 검토한 후 국회에 해결책을 건의하라는 것이었다. 이 특별위원회에 상원의원5명, 하원의원 5명, 대법관 5명이 위원으로 임명 되었는데, 공화당원 7명, 민주당원 7명,무소속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특별위원회가 어느쪽 보고서를 받기로 결정하는 데에 따라서 당선자를 결정하자는 그럴 듯한 구상이었다. 그런데 무소속으로 있던 대법관 한명이 당시의 규정에 따라 Illinois 주 하원에서 연방상원의원 으로 선출되자 위원 자격을 잃게 되었고, 그를 대체 해야 할 대법관들은 전부 공화당원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위원회는 공화당원 8명, 민주당원 7명으로 구성되었고 위원회는 공화당 측의 투표결과 보고서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여 185 대 184 로 당선되었다고 Hayes 후보의 양손을 번쩍 들어 주었다. 도대체 이것이 뺑뺑이돌리기 도 아니고 명색 이 미국 대통령선거란 말인가! 결국 1876년의 대통령선거는 좋은 선례를 만들어 놓았지만 대통령 선거제도는 아직도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았다. 특별위원회의 건의는 공화당쪽이 유리하도록 국회에 올라왔지만 이제 남은 문제는 이 건의안이 국회를 통과 해야만 하는데 상원은 공화당이 다수당이고 하원은 민주당이 다수당 이어서 위원회의 제안이 양원을 통과할 수 있느냐가 더 크고 새로운 문제로 남게 되었다. 남북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 같은 험악한 정치적 위기였다.

마침 이때에 이러한 정치적위기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남부 백인 보수파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Hayes 후보 측에게 협상을 하였다. 그들의 요구조건 몇 가지를 들어주면 Hayes 후보를 지지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었다. 그들은 1. Florida, Louisiana, South Carolina 주들에서 연방군들을 철수하고 군정을 종식할 것, 2. 최소한 한명의 남부인사를 장관에 임명할 것, 3. 남부 민주당이 요구하는대로 일부 남부지역의 연방공무원들을 임명할 것, 4. 남부의 조속한 재건을 위해서 연방정부가 충분한 재정지원을 할 것 등이었다.

Hayes 는 요구조건들을 수락하였고 하원은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이틀 전에 Hayes 의 당선을 통과시켜 주었다. 이 남부주 의원들을 “정상배들” 이라고 불러야 할런지 아니면 위기의 국난을 해결한 타협할 줄 아는 정치가들이라고 불러주어야 할런지는 말하는 사람의 정치철학에 달려있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어리석은 대통령선거제도” 때문에 미국의 국력이 어지간히 낭비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일이다. 또 이같은 응급조치식 정치적 흥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Hayes 가 대통령직을 사기로 훔쳐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를 “His Excellency” (각하) 대신에 “His Fraudulency” (“사기꾼님” 이나 “날강도님” 정도로 의역될 수도 있는 호칭) 라고 비꼬아서 불렀다고 한다.

Hayes 대통령은 취임후 한달 만에 마지막의 연방군들을 남부에서 철수시켰으며 두 달 후 에는 Tennessee 주의 Chattanooga 에 있는 남부군 전사자 공동묘지의 개량식전에도 참석하였고 남부재건에 많은 연방예산이 돌아가도록 하였고 남부쪽 연방공무원들을 임명할 때에 남부쪽의 의견도 존중하였다. 남북 화해의 첫 걸음이 시작된 셈이었는데 그 대가로 북부측의 더러 “무리하고도 무분별한 흑인인권보호”정책도 포기하여 가게 되었다.

2000년도의 대통령 선거 때에도 이 요상한 미국의 대통령 선거제도 때문에 Florida 주 에서는 당시 공화당원이었던 Secretary of the State 의 변칙적인 투표결과 확인서 때문에 George W. Bush 후보가 Florida 주에서 승리한 것으로 보고되자, 연방대법원이 개입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대법관들이 대부분 공화당 편향의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Al Gore 민주당후보는 대통령직을 오랫동안 공석으로 둘 수 없다는 생각에서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여 Bush 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하였다. Gore 는 일부 에서는 애국자 란 평을 들었다. 1876년도에도 Tilden 은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었으나 국회의 결정을 깨끗이 받아드리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역시 그의 결정을 애국적인 것이었다고 높이 평가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필자는그때 Tilden 이 어떻게 행동했어야 정말 애국적인 것이 었겠느냐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서지 않지만, 미국의 대통령 선거 제도가 그때나 지금이나 상당히 어리석은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Tilden 은 1886년에 사망하면서 유산 240만 달러 (2015년 돈으로 6천3백만달러) 를 내놓으며 뉴욕시에 무료공공도서관을 세우는데 써달라고 하였다. 그후 1901년에 Andrew Carnegie 가
520만 달러를 내놓아 Tilden이 원했던것 처럼 당시 뉴욕에 있던 사립유료 도서관 몇 개를 병합하여 현재 87개의 지관이 있는 New York Public Library 가 1911년에 설립되었다. 이 도서관은 Gutenberg 동활자로 인쇄한 초판 성경책을 비롯하여 5천백만 여점의 소장품이 있는 미국 두 번째의 도서관 (첫 번째는 미국회도서관) 이며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서관이라고 한다.

Hayes 는 넉넉지 않은 농부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그의 출생 얼마 전에 사망해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위의 두 형들이 일찌기 사망하여 누나와 함께 홀어머니 밑에서 외삼촌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는데 노력형이었던지 Ohio 주의 Kenyon College 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Harvard 법대를 나와서 Ohio 주의 변호사가 되었다. 그의 부인 Lucy Webb 는 Cincinnati Wesleyan Women’s College 를 졸업했는데 그때까지의 미국의 First Lady 들중 최초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다.


Hayes 부부는 금실이 좋았으며 여덟 남매를 자녀로 두었다고 한다. Hayes 는 Cincinnati 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가 시의 검찰국장이 되었다. 39세가 되던 1861년에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육군소령으로 북군쪽으로 참전하였으며 종전될 때 까지 다섯 번이나 부상을 당하면서 육군소장으로 까지 진급하였다. 남북전쟁이 끝나던 1865년에 Ohio 주 공화당은 그를 연방하원 의원으로 공천하였는데, 아직 현역군인이 었음 으로 전혀 선거운동 을 하지 않았으나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예편과 함께 하원의원을 두 번 연임하고 Ohio 주지사에 당선되어 두 번 연임을 하였다. 두 번째 임기가 끝난 후 정계를 은퇴할 생각이었 는데, 공화당은 그를 다시 하원의원으로 공천하였으나 낙선되었다. 그후 다시 공화당 후보로 주지사에 당선되었는데 선거유세 중 흑인들의 투표권 보장과 미국의 금본위 화폐 제도 등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세 번째 Ohio 주지사를 하던 중 1876년에 원래 계획 하지도 않았던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기간은 미국 역사상 가장 혼돈스러운 때로서 아마 어느 누구라도 훌륭했던 대통령이었다는 평가를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 에서 공약한대로 재출마하지 않았는데, 역사가들은 그를 중급 정도의 대통령 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에 흑인 인권 향상, 인권 평등, 여성권리 신장, 교육제도개선, 연방 정부에의 직업공무원제도 도입 등을 위해서 노력했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해도 여성 변호사의 법정변호에 제한이 있었던 모양이었는지 Hayes의 노력으로 이런 제한이 1879년에 철폐되어 1880년에 처음으로 여성변호사가 연방대법원에서 변호했다고 한다.

그는 퇴임 후에도 흑인들의 인권 향상, 교육제도의 개선, 형무소의 시설개선, 기타의 humanitarian 사업들을 돕기위해 연설을 하고 다니는등 활동하다가 70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 후에 그의 아들 Webb Hayes 가 주동하여 Hayes 대통령 기념도서관을 Hayes 의 제2의 고향인 Fremont, Ohio 에 설립하였는데, 그 도서관이 차후 대통령 기념도서관의 건립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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