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86): 남북전쟁 이후의 정치적혼돈 (7)

2016-01-08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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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기간”이라고도 불리울수 있는 남북전쟁 종전후의 남부주들의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Scalawags (변절한 남부백인들), Carpetbagger (무일푼으로 북부에서 남부로 내려온 백인들), 새로히 등장한 흑인 정치꾼들이었다고 남부백인들은 말하였다.

남부백인들은 새 남부주정부들이 소수의 악질적인 백인들의 배후조종을 받은 어리석은 흑인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고도 말하였다. 그들은 이런 새 남부주정부들이 부패하였고 사치스러울 정도로 낭비가 심해서 남부주들의 발전이 수십년간 지연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이러한 비난들과는 달랐다.

사실상 흑인들이 남부주들을 완전히 장악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예를 들어서 South Carolina 주에서는 흑인들이 1874년까지 하원을 장악하였지만 상원과 주지사직은 항상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새 남부주정부들이 “사치적 과용”을 하였다는 주장에는 다소 수긍되는 이유는 있었다. 새 주정부들은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경제를 부활시켜야 했고 파괴된 철도들을 재건해야 했고 전쟁전에는 없었던 무상 국민교육을 위하여 새 학교들을 지었어야 했으며 새로 생긴 사회 복지정책을 집행했어야 했었다.
새 주정부들의 이와같은 정책들은 당연히 주들의 예산이 증대 할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세금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남부의 백인들은 올라간 세금에 대해서 불평하였었고 농장주들은 세금납부를 거부하기도 하였었다. 그결과로 새 남부주들은 증가된 세출을 충당하기 위하여 공채를 발행 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비난은 새 남부정부들이 부패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었던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주정부나 시정부가 뇌물, 사기, 공금횡령 등으로 부패해 있었던 때이었던 까닭에 남부주정부들이 특별히 부패했다는 비난은 온당한것이 아니었다. 남부주들의 부패정도는 새 발의 피였다고 할 수 있었다.
예를들어 New York시의 정치 보스이었던 William M. Tweed 일당이 New York 시를 등쳐먹은 정도나 군정기간이 끝난후의 남부주들의 부패정도에 비하면 특별히 심각하게 부패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상 군정 (주정부재건) 기간은 2-3년 정도로 별로 긴것도 아니었다. 남부의 흑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면 정권이 공화당측에 돌아가게 되어 있었음으로 남부의 백인들은 흑인들이 투표할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또는 폭력으로 흑인들의 투표를 방해하기 시작 하였다. 거의 모든 남부주들에서 비밀폭력단들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Ku Klux Klan (KKK) 이 조직되어 각주에 지부들을 설립하였고 또 Tennessee, Louisiana, North Carolina, Mississippi, Texas 주등에도 KKK 와 이름은 다르나 유사한 성격의 비밀 폭력단체들이 독자적으로 조직되어 투표를 하고 참정하려하는 흑인들을 위협, 납치, 상해, 살인등의 폭행을 하였다. 예를들어 1871년에만 Florida 주의 한 county 에서 흑인 163명이 살해 되었고 New Orleans 근처에서는 300명 이상의 흑인들이 살해되었다.
수 천 명의 흑인 들이 상해를 입었고 살던 고장을 떠나야 했으며 흑인동네가 송두리채 없어진 곳들도 있었다. 북부의 압력으로 어떤 일부 남부주들은 이러한 폭행을 금지하는 법들을 만들었 으나 실효가 없었다. 1870년 12월에 Grant 대통령의 남부주 흑인폭행들에 대한 강력한 비난이 있자 미국 국회는 Ku Klux Klan Act 를 입법하여 백인들의 폭행을 단속하려고 하였으나 역시 큰 실효를 얻지 못했다.

종국적으로 종전전의 보수백인들이 거의 모든 남부주들의 정권을 다시 잡았고 이제는 흑인들에 대한 “폭행”을 거의 제도적으로 다시 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남북전쟁 에서 얻은 것은 “노예제도”를 법적으로 폐지한것 뿐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종전 후에 사실상 백인농장주들 에게서 몰수한 농지등을 분배받은 전노예들은 거의 없었고 급과파들이 한때 추진하려했던 흑인들의 경제적인 독립은 꿈으로만 끝난채 북부는 서서히 남부 에서 손을 떼기 시작하였고 급과파들을 주동하던 정치인들도 사망하고 그들의 영향력도 많이 줄어들었다.

전노예들은 이제는 노임을 받는 “머슴”이 되어들 갔는데 경제적으로도 노예시절보다 생활보장이 된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배부르고 등만 따신 노예” 보다는 싫으면 아무때고 떠날 자유가 있는 “배고픈 머슴”이 이론적으로는 났지 않은가! 아니 이론적만이 아니라 천재를 타고 났더라도 노예는 계속 노예로 남아있게 마련이었지만 한때 배고팠던 자유인들은 만일 타고만 낳다면 천재를 발휘해서 Oprah Winfrey 도 되고 Whitney Houston 도 되고 Marian Anderson 이나 Leontyne Price 도 되고 Barack Obama 도 될 수 있는 세상의 문이 드디어 그들에게 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1872년의 대통령선거에서 Grant 는민주당과 신자유공화당의 후보였던 Horace Greeley 와의 경합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Greeley 는 New York Tribune 의 편집국장으로서 “Go West, young men, Go West!” 라는 충고를 젊은 사람들에게 준 사람으로 알려져있었는데 자기 신문사의 인쇄직원들을 노조화 시킬 정도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반노예주의자 이며 여권신장주의자 이기도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Greeley 는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보다 너무 멀리 앞장서서 갔었던 진보주의자이었던지 별 치적도 없었던 Grant 는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Grant 의 2차 임기는 시작부터 큼지막한 부정사건으로 얼룩지게 된다. Lincoln 정권때인 1862년에 시작된 대륙횡단 철도 건설사업에 연방정부 예산이 막대하게 투입되었 었는데 그중에서 상당한 액수가 부정한 방법으로 횡령되었고 그 부정을 은폐하기 위해 부통령과 몇 국회의원들에게 뇌물까지 주었다는 것이었다. 이 부정사건은 모두 Grant 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일어나고 끝이 난 사건이었는데 Grant 재임 중에 그 부정사건이 노출되자 “정치하는 놈들은 다 도둑놈들이다” 라는 비난이 Grant 에게도 흙탕물처럼 튕겨졌다. 물론 Grant 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같은 해인 1873년에는 국회의원 세비대폭인상 사건이 터졌다. 국회는 의원들의 세비를 50% 나 대폭으로 인상하고 그 인상액을 2년전으로소급해서 지불하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대법관들의 연봉을 올리고 대통령의 연봉도 2만5천달러에서 5만달러로 올리는 법을 통과 시켰는데 재임중의 대통령은 대통령의 연봉을 올릴수 없다는 헌법 규정을 회피하기 위해서 Grant 는 이법에 1차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날 서명하였다.

의원세비 인상에 대한 여론이 극히 나빠지자 국회는 세비인상법을 폐기시켰는데 대법관들과 대통령의 인상된 년봉은 원안대로 집행되었다. Grant 대통령이 또 “억울하게” 비난을 받게 되었었다. 그 다음 해에는 양조업자들이 재무성 관리들과 공모하여 수십 만 달러의 주세를 탈세한 사건이 발각되었다. Grant 자신은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지만 그의 재임중에 일어난 부정사건 으로 그는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책임추궁이었다.

드디어 Grant 의 각료들이 직접 부정에 개입한 사건들이 발각되었다. Grant 의 해군 장관이 군수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건이 발각되었고 그의 전쟁부장관도 뇌물수수 를 한것이 발각되어 하원의 탄핵을 받았다. 전쟁부장관이 형사적인 처벌을 받기 직전의 단계에서 Grant 는 실수로 그의 사표를 수리함으로써 전쟁부장관이 형사처벌을 받는것을 면하게 되었는데 Grant 는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남북전쟁중 부하장병에 대한 용병술이 탁월했다는 호평을 들었던 Grant 는 대통령으로서는 등잔불밑 에서 측근들이 절도행위를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무능한 대통령이었다.

위와 같은 부정사건들보다도 그의 임기를 정말 어렵도록 만드는 사태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북전쟁 종전후, 전쟁 중에 파괴된 철도를 복구하고 증설하기 위하고 부숴진 공장들을 재건하기 위하여 연방정부는 무리한 재정지출을 했어야 했고 일부 철도회사들과 철도에 투자했던 금융회사들이 도산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또 1871년과 1872년에 Chicago 와 Boston 에서 대화재들이 발생하자 보험회사들은 2억7천3백 만 달러를 지불하게 되어서 보험, 금융회사들이 모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러한 여건때문에 1873년부터 미국 초유의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어 Grant 대통령의 임기중이었던 그후 5년동안 공장들과 철도회사들과 은행들이 문을 닫았고 전국에 실직자들이 범람하였고 굶어죽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와같은 난맥상태로 Grant 대통령은 임기를 끝마쳤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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