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85) 남북전쟁 이후의 정치적 혼돈(6)

2015-12-31 (목) 조태환
크게 작게
새 남부정책을 제정한 급과파들은 이제는 칼날을 존슨 대통령에게 돌렸다. 이때쯤에는 존슨 대통령은 자신이 위헌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국회의 입법에 따르려고 몸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급과파들은 자기들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되지 않는 대통령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결심하였다.

국회는 헌법에 대통령전권 항목으로 규정되어 있는 권한들을 뺐어오기 시작하였다. 일례로 헌법에는 대통령에게 군사통치권 (Commander-in-Chief) 을 부여하고 있었는데, 급과파들은 새 군부통치권 (Command of the Army Act) 법을 새로 제정하여 대통령의 군부에 대한 통치권을 제한시켰다.

국회는 사실상 덫이 달린 법들을 만들어 놓고 대통령이 덫에 걸려들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아무리 작은 법률이라도 위반하면 즉각 탄핵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 한국에서도 당시의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어거지스러운 이유로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던 것과 비슷한 정치적 상황이었다고 할까.


링컨 대통령의 전쟁부장관으로 일하던 스탠튼 장관은 존슨 대통령의 전쟁부장관으로 계속 일하고 있었는데, 새 대통령과 불화가 계속되고 있다가 급기야는 존슨 반대파의 지도자격이 되어가고 있었다. 존슨이 스탠튼을 파면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급과파 주도하의 국회는 임기보장법 (Tenure of Office Act) 을 입법하였다. 이 법은 상원의 동의가 없이는 대통령은 연방공무원을 파면할수 없다라는 “어거지법” 이었다.

존슨 대통령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었다. 존슨은 스탠튼 을 파면하였으나 스탠튼은 장관직을 사임하지 않고 사무실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버티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갯 거리같은 대통령과 국회의 정면 대결이었으나, 그 당시에는 아주 심각한 정치적 난국에 처한 일이었다. 급과파는 대통령이 드디어 덫에 걸렸다고 생각하였다.

대통령을 탄핵해서 국회가 거의 완전하게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미국헌법에는 대통령이 “반역, 뇌물수수, 기타의 중죄” 를 범하였을 때, 하원이 과반수로 탄핵을 했을 경우, 연방 대법원장이 사회를 보는 상원이 재판을 하고, 출석의원 3분의 2가 유죄라고 투표하면 대통령이 파면하게 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일반법률의 통과보다는 훨씬 더 대통령의 유죄판결이 어렵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의 Founding Fathers 들은 왕권전제주의에 신물이난 사람들이었던 까닭에 통치권을 법률로 사방에서 규제받는, 국민이 선출한, “시한부 왕”인 대통령을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발명해 놓은 후, 그러나 선출된 임기동안에는 안심하고 정치를 할수있게 하기 위해 “임기보장”을 위해서 탄핵이 어렵도록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마치 장차 닥쳐올 지도 모르는 정치적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도 헌법 속에 현명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과연 존슨 대통령이 탄핵을 받아야만 할 범죄를 하였느냐에 대한 여론이 분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급과파인 하원의 Thaddeus Stevens 하원의원은 존슨 의 탄핵을 주도하였고, 상원의 탄핵재판이 시작되자 그는 노환 중에 있었으나 환자 이동침대에 실려나와 “탄해검사” 로써 상원에서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역시 급과파였던 상원의 Charles Sumner 의원은 유죄판결을 얻어내기 위해서 노력을 하였으나 존슨 대통령임기 마지막 해인 1868년 5월 16일에 있었던 미국 역사상 처음의 대통령 탄핵재판은 찬성 35표, 반대 19표로써, 한 표 때문에3분의 2인 36대 18 이 되지 못하여 무죄판결이 되었다.

존슨 대통령의 이 탄핵재판은 미국 역사상 아주 중요한 선례가 된다. 만일 그때 그 탄핵이 유죄판결로 끝났다면, 대통령중심제인 미국의 정치제도는 사실상 ‘영국식 의회중심제’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선례는 공화당 급과파들이 상원의 판결을 아무 잡음없이 받아들였던 점이다.


미국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통치원리가 불완전 하게나마 정치에서 실제로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 시금석 이었다. 정치적 불만이나 불화를 혁명이나 군사정변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않고,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미국의 전통이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생각된다.

존슨 대통령의 탄핵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때인 1868년의 제18대 대통령선거에 공화당은 남북전쟁말기의 북군총사렁관을 지낸 전쟁영웅 Ulysses S. Grant 장군을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그는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인데, 항상 복장이 단정하지 못하고 과음까지 한다는 평판 때문에 일찌기 장군으로 예편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육사에서 배운 전투법을 잘 쓰지 않는 것이 그의 장점 이었다는 소리도 들었고 , 전투를 이기기 보다는 전쟁을 이기는 전술을 썼다는 평을 들었다고도 한다.

남북전쟁 중 링컨 대통령이 그를 북군사령관으로 다시 불러들였고 그는 남북전쟁을 Sherman 장군과 Sheridan 장군등과 함께 승전으로 이끌었다. 링컨 대통령은 그를 워싱턴 장군 이후 최초의 육군중장으로 진급시켰다. 공화당은 남북전쟁 종전 후 존슨 대통령의 계속적인 실정으로 국민의 지지를 많이 잃고 있었다.

정직하고 지도력이 있는 청신한 후보가 필요하였는데 Grant 장군이 그러한 요건들을 갖춘 후보라고 생각한 것이다. Grant 는 정치에는 일자무식인 사람이었으나 성실한 전쟁영웅으로써 북부쪽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

한편 민주당은 정직하고 점잖은 정치인으로 평판이난 Horatio Seymour 전뉴욕주지사 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남북전쟁중에 주지사로 재임하였던 Seymour 는 노예해방 주의자와 남부의 극열주의자들을 다 반대하고 남북전쟁에도 반대하던 중립적인 사람이 었으나 전쟁중 뉴욕주에 할당된 병력을 모두 채워서 북군을 도와주었던 사람이었다.

양당후보가 다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었으나 찬밥 더운밥을 가릴 형편이 못되는 남부쪽 에서는 둘 중에서 Seymour 후보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극렬한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중에 공화당은 그야말로 “피에 얼룩진 셔츠”를 휘둘러 가면서 그들이 얼마나 많은 목숨을 건 희생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국가분열이 저지되었음을 상기시켰다. 선거결과 대통령 선거인단 표수로 Grant 는 214표를 얻었고 Seymour 는 80표를 얻는데 그쳐 일단 Grant가 압승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양 후보들이 실제로 받은 투표자들의 득표수를 보면 실로 아슬아슬한 선거이었다. 총투표자 570만명 중 Grant 가 Seymour보다 더 받은 득표 수는 30만표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처음 투표권을 행사한 남부 흑인들의 65만표가 없었다면 Seymour의 득표 수가 Grant 가 받은 득표 수 보다 더 많았을 것이었다. 미국대통령선거의 특이한 선거인단 투표제도 때문에 이 1868년의 대통령선거 이후에도 국민들의 실제 투표수는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는 낙선된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바로 지금부터 몇 해 전에도 앨 고어 민주당후보가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에게 같은 이유로 낙선된 일이 있었다.

위와 같은 선거결과를 보고 공화당은 남부주들의 통제를 더 강화해야 하겠다고 생각 하고 흑인들의 투표권을 확실히 보장해 주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흑인들의 투표권 보장은 대의명분도 있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공화당은 미국헌법 제15개정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제15개정은 연방정부나 주정부가 “인종, 피부색갈, 종래의 신분”등을 이유로 미국시민의 투표권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이었는데, 결국 1870년 3월 30일에 헌법개정으로 채택되었다.

남부에서는 북군 군정장관 들의 감독아래 새 주정부 헌법들이 쓰여지고 새 주정부들이 구성되고 있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와 루이지애나 주를 제외한 모든 남부 주들의 새 제헌회의는 모두 백인들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였다. 대부분의 흑인대의원들은 문맹자들이었으나 그중에는 상당한 고등교육을 받고 정치경력이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 제헌회의들에서 흑인대의원들은 놀라울 정도로 과거에 자신들의 주인이었던 백인들에게 맺힌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고, 도리어 전 남부 주에서 일했던 백인들의 권리를 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새 제헌회의들은 연방국회의 지시에 따라 남부주 협력자들이 주정부직에 임명되는 것을 금지시켰고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그전에는 남부 주들에 없었던 여러 가지의 사회복지사업을, 또 고아와 불구자들을 돕는 대책을 마련하였다. 새 주헌법들은 흑인들이 입법과정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백인들의 비난과 반발을 받았으나, 결국은 새 주들의 헌법으로 제정되었으며 군정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남부주들의 헌법으로 쓰여졌다.

<조태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